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나 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직접 내 돈을 주고 산 첫 크리스마스 트리이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이후 너무나 오랜만에 장식해본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후로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하지
않았고, 당연히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입한 적도, 장식한 적도 없었다.

영국에 와서도 월셋방에 살면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여놓는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주 테스코에 장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나 발견했는데, 높이도 한 50cm
정도에 자체 발광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서 전구도 별도로 구입하지 않아도 되는 미니 트리였다. 무엇보다
가격을 할인 중이어서 10파운드도 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급기야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고야 말았다.

워낙 아담한 미니 트리라서 그냥 서랍장 위에 설치했고, 장식도 많이 할 필요가 없을 듯 해서 은방울과
은색 구슬띠만으로 간단하게 장식을 했는데, 완성해놓고 보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예쁜 트리였다.

트리 밑에다가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하이드파크에서 열리는 윈터 원더랜드의 크리스마켓에서
매년 한 두 개씩 사서 모으고 있는 작은 크리스마스 조각품들을 진열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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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랜만에 가져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다섯 살 무렵부터 살았던 마포구 중동의 성산아파트 시절, 마루라고 해도 지금 내가 사는 방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던 그 작은 마루 중앙에 냉장고가 있었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 냉장고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반짝이던 그 크리스마스 트리가 어린 시절에는 어찌나 신기하고 신나던지, 부모님께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잠들고 나면 그 트리 밑에 평소 내가 갖고 싶어했던 장난감을 포장해서 놔두시곤 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시에는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가 그 밤에 다녀가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고, 크리스마스 이브 한밤 중에 깨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여진 선물을 가져오곤 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비몽사몽한 와중에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예쁜 빛을 발하던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그
밑에 놓여진 선물, 선물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그 황홀하고 신비롭던 동심 속의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흔히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동심을 잃어간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리도 굳건히 산타를
믿었건만, 내가 바라는 선물의 가격이 만원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안의 선물들은 모두 부모님이 사서 놔두신 것이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떻게 산타가 그렇게 내가 딱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정확하게 가져다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
되었지만, 산타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비록 나는 그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돈을 만지고 있고, 어린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건만, 그 대신 그 어린 시절 행복했던 동심은 이제 내가
가진 돈을 다 주고서도 살 수가 없다.

오늘 밤 꿈 속에서나마 좁디 좁은 성산아파트에서 살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여진 선물을 발견하고 싶다.

아마 그 곳에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을 우리 부모님의 젊은 시절 모습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가 선물을 놔두셨을 부모님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