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7일 수요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노라니...

얼마 전 회사 앞에서 멀쩡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멀쩡하게 생긴 서양인(영국인 혹은 유럽인)
샌드위치맨처럼 커다란 양면 간판을 몸 앞과 뒤에 늘어뜨리고 걷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Job Wanted, 즉 일자리 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최근 직장을 잃은, 제법 유능했던 사람 같은데...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 금융가에서
누군가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동시에 누군가는 일자리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니...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와 불경기의 여파가 끝났나 싶더니, 최근 유럽의 재정위기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지난번 보다 더 심각한 불경기가 찾아오려는 것 같다.

경기가 나빠지면 당장 내가 일하는 채용/헤드헌팅 업계에서 그 파급효과가 민감하게 감지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증가하는데, 일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감소한다.
직업을 찾아달라는 후보자들은 많은데, 이들에게 소개해 줄 일자리가 너무 없으니, 헤드헌터인
나 역시 같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신규 채용은커녕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회사들도 너무 많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들이 부러운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대기업들도
순식간에 휘청거리고, 수 년 동안 일한 직원들을 가차없이 내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 기분, 아직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이미 간접적으로 겪은 것
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것일지 충분히 공감이 된다.

부양할 식구들이 있고, 매달 무조건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금액이 상당하다면, 게다가 나이까지
어느 정도 있어서 재취업도 어려운 이들이라면, 정말 일자리를 잃었을 때 눈 앞이 캄캄할 것 같다.

방값과 차비 말고는 신용카드도, 장기계약 휴대폰도 없어서 정기적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없는,
그래도 아직은 젊다면 젊은 나 조차도 당장 실업자가 된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빚 안 지고, 그래도 밥 안 굶고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기적인 것 같다.

그런데, 가끔 좋은 음식점이나 쇼핑가를 방문해보면 여전히 손님이 미어 터진다. 잘 되는 음식점은
이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가격을 올렸고, 여전히 줄을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고급 쇼핑점 역시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럴 때면 혼돈이 온다, 정말 불경기가 맞는 것인지. 다들 무슨 일들을 하길래, 다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길래 저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걸까? 마치 나만 가난하고, 나만 아둥바둥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나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도 많고, 정말 하루 하루 생존이 전쟁 같은 사람들도 많은데, 또 한
편에서는 그야말로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요즘, 정말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가끔은 나도 든든한 배경을 지녀서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는 이들, 아니면 적어도 일자리만이라도 보장되는 한국의 공무원이 부러울
때가 있다. (영국이나 유럽은 공무원도 해고 당한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대통령 아들이 10억을 주고 땅을 매입하려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화가 났다가
결국은 허탈해진다. 화가 나는 이유는 어떻게 나랑 나이가 비슷한 그 친구가 10억이나 되는 돈에
연루(?)될 수 있느냐 싶어서, 그리고 허탈해지는 이유는 어차피 그래봐야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까.

주어진 환경을 탓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정말 못난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정말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나 정도면 그래도 너무나 감사한 배경을 지녔고,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과분한 삶을 누리고
있다. 정말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너무나 억울했을 것 같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심할 만큼 어렵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오버하는 것 같지만 정말 솔직히 나는 과연 인류가 앞으로 과거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비록 현대 인류는 거대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최첨단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먹고 살기는 과거보다
훨씬 치열해졌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더욱 피폐해졌다.

그저 땀 흘린 만큼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적당한 규모의 집을
장만하고 적당한 나이에 은퇴해서 남은 여생을 즐기는 게 상식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지난 오랜 세월동안 ‘선진’, ‘복지’, ‘삶의 질’ 이런 단어들로 대표되었던 유럽이 그야말로 휘청거린다.
어떻게든 구급처방을 써보지만, 결국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유럽이 넘어지면 유럽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가 그 통증을 견뎌야 할
것이다. 부디 우리에게 그 통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