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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0일 금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5.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5. 
꽤나 굵은 빗속에서 몸과 일부 짐은 다 젖었는데 야영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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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산죠르죠디로멜리나 피자 가게의 헛간] 

빗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꽤나 굵은 비가 내린다. 그런데 머리에 미열과 함께 몸살이 좀 있다. 어제 처음으로 자전거를 오래 달렸고 체온 조절을 제대로 못 한 게 문제다. 달릴 때 제 때 옷을 벗지 않아 땀이 제대로 마르지 않았고 피자 가게에 와서는 덥다고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질 때까지 옷을 벗고 있었다. 초보자라 시작부터 문제다. 
몇몇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에 포기했다는 당사자나 또는 그들의 주변인들의 사례를 들었다. 단순 힘든 것쯤이야 분투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아프면 대책 없다. 앞으로 몸 관리는 잘 해야겠다. 음식이라곤 라면과 양갱밖에 없다.
아침으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다시 자고 일어났더니 점심나절이다.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아무래도 라면보단 피자 하나 사먹는 게 날 것 같아 비를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어젯밤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던 아저씨는 없고 상냥하던 아주머니만 있다. 
피자는 저녁부터 된다고 말해주더니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는 표정과 함께 오늘 텐트를 거두길 바란다는 것을 어정쩡히 표현했다. 공짜 지붕은 이제 끝이다.  떠나든지 아니면 2층에 작게 운영하는 호텔방에 들어가든지 하나 결정하라는 뜻이다. 전혀 문제 없다고 말하고 돌아왔지만 사실 문제가 많다. 인터넷도 없는 호텔방에 20여 유로 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감기 기운 있는 이 몸을 빗속의 타악기로 내던지고 싶지 않다. 오늘은 분명 쉬어서 몸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몇 시간 자고 일어났더니 비는 여전하나 머리에 열은 사라졌다. 어차피 호텔을 이용해야 한다면 다음 마을에서 인터넷이라도 되는 호텔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비닐봉지를 셀로판테이프로 이어 붙여 자전거의 짐을 감싸고 방수 바지와 일회용 우의를 입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떠나기 전에 인사하고자 가게에 다시 들어가니 이번엔 아저씨만 있다. 아저씨는 어젯밤처럼 유쾌하지 않게 ‘너 제정신이냐’라는 표정으로 비 오는데 왜 굳이 떠나냐, 더 머물다 가라 한다. 표정이 상냥하다고 호의를 더 잘 제공하는 건 아니구나.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미 무장도 했겠다 어디 한번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빗속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겨우 20분간 다음 마을인 로멜로(Lomello)까지 5 km를 달리고 나니 신발과 상의가 이미 다 젖고 방수 바지 속도 조금 젖어 들었다. 날도 벌써 어두워졌고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빗속에서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여기 로멜로에서 머물러야 한다. 
마을사람의 도움을 받아 함께 세 호텔을 가봤지만 모두 닫혀있거나 남는 방이 없다. 또 적당히 텐트 칠만한 곳도 없다. 후회가 몰려온다. 그냥 피자가게 헛간에 머무를걸. 이미 컴컴한 밤이 됐고 더 늦기 전에 일반 가정집의 도움을 받기 위해 초인종을 눌러보기로 결정했다. 이 녀석 지금 거두어주지 않으면 어디 가서 죽을 놈이다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면 분명 반응을 보여줄 집이 있을 것이다. 
아직 3월초라 날도 아직 춥다. 간절한 눈빛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 텐트와 함께 자전거로 여행 중이야. 그런데 비가 와. 도와줄 수 있어?” “저기 호텔이 있어” “호텔 세 군데 모두 닫았거나 꽉 찼어.”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리고 절실한 고집 끝에 드디어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자전거 관련 프로 운동선수이고 남자친구도 오토바이로 여행을 종종 한다며 날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로멜로 키아라 집에 도착했을 때 뒤 짐받이의 짐과 일부 다른 짐이 이미 비에 젖었다. 뒤 짐은 방수가 아닌 비닐재질 직물의 이키아 가방이기 때문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JPG
[로멜로 키아라 집에 도착했을 때 뒤 짐받이의 짐과 일부 다른 짐이 이미 비에 젖었다. 뒤 짐은 방수가 아닌 비닐재질 직물의 이키아 가방이기 때문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저녁으로 파스타 괜찮으냐는 질문에 이탈리아에서 먹는 첫 진짜의 파스타인데 당연히 기대된다고 대답했다. 아들 나이가 나와 비슷한 키아라(Chiara) 그녀는 혼자 살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뚜렷한 직업이 없었고 이탈리아 경기 침체 때문에 직업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밀라노에서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이 로멜로 동네에 겨우 한 달 전에 인터넷 선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내가 설거지나 뭐 도와줄게 있는지 물어보자 그녀는 대신에 친퀘테레와 다른 여행지에서 두 번 엽서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면 싱거워 보이지만, 사실 마음이 담긴 것을 받고 싶은가 보다.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엽서 보내기인데 나도 당연히 정성 어린 엽서를 보내고 싶다. 

키아라가 방 하나 내어 주었다..JPG
[키아라가 방 하나 내어 주었다.] 

모험 15일 아침, 비가 오지 않는다. 사실 어제 확인한 오늘의 일기예보는 비였다. 그래서 어제저녁 때 키아라에게 혹시 오늘도 비가 오면 하루 더 묵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내게 하룻밤만 편의를 제공하고 더 머물고 싶다면 호텔에 가길 바란다며 거절했다. 
아직 추운 날 덕분에 라디에이터를 여전히 가동했고 다행이 몸도 좋아지고 신발, 옷 등도 대부분 말랐다. 더 이상 로멜로에 더욱 머물 필요가 없다. 

이튿날 키아라와 작별하고 건조해진 자전거를 다시 몰았다.JPG
[이튿날 키아라와 작별하고 건조해진 자전거를 다시 몰았다.] 

누군가는 이미 떠나간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jpg
[누군가는 이미 떠나간 누군가를 잊지 못한다. ]

특이하게 제각각 기울어진 주차장 전등.jpg
[특이하게 제각각 기울어진 주차장 전등] 

50 km쯤 떨어진 세라발레스크리바(Serravalle Scrivia)에서 밀라노에서 자전거와 자전거 기타 장비를 구입한 이탈리아 전역의 체인 스포츠 용품점 데카틀론의 다른 지점을 발견했다. 기회다 싶어 종종 작동을 멈추던 자전거 속도계를 더 고급 제품으로 교환하고 무게만 나가고 자전거 라이트로 대체할 수 있는 텐트용 랜턴을 환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의 비에 대비하기 위해 방수 점퍼, 방수 바지, 자전거 뒷짐을 위한 방수 커버 등을 구입했다. 
뒷 페니어는 방수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사실 앞 페니어가 방수가 아니기 때문에 앞 페니어를 위한 방수 커버도 필요하다. 그러나 구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 페니어 한 쪽이 이미 뜯어져 오래가지 않아 결국 새로 사야 할 것 같고 산다면 제대로 된 방수제품을 구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 비가 온다면 비닐봉지 등으로 그때 가서 해결책을 생각해볼 것이다. 

우천 대비책으로 방수 점퍼, 추가 방수 바지, 방수 커버를 구입했다. 방수 점퍼의 경우 기능면을 고려하여 xxxl 최대 사이즈를 선택했다.jpg
[우천 대비책으로 방수 점퍼, 추가 방수 바지, 방수 커버를 구입했다. 방수 점퍼의 경우 기능면을 고려하여 XXXL 최대 사이즈를 선택했다.] 

세라발레스크리바에서 밥, 고추장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삼겹살은 역시 덴마크가 맛있다. 이탈리아에 다양한 종류의 쌀이 있는데 이날 쌀알은 굵어 밥맛이 잘 안났다.JPG
[세라발레스크리바에서 밥, 고추장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삼겹살은 역시 덴마크가 맛있다. 이탈리아에 다양한 종류의 쌀이 있는데 이날 쌀알은 굵어 밥맛이 잘 안 났다.] 

  모험 16일 아침, 누군가 텐트(좌표: 44.726066, 8.856338)에 노크를 하며 날 깨운다. 내게 커피를 건네는 이 남자는 여기 슈퍼마켓 처마 아래 텐트를 치면 안 된다며 치우라고 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에 이렇게 감동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구나. 
그런데 이런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앞 페니어의 오른쪽 가방 아래 귀퉁이 역시 왼쪽처럼 터진 것을 발견했다. 맘마미아! 어찌 이 가방은 이리도 약하단 말인가. 이런 모험적 여행의 묘미는 어렸을 적 보던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문제 발생시 스스로 해결하는데 있다며 지난 왼쪽 가방 때보다 잘 꿰매버렸다. 

슈퍼마켓 앞에 텐트 치면 안 된다며 한 남자가 아침에 커피와 함께 날 깨웠다.jpg
[슈퍼마켓 앞에 텐트 치면 안 된다며 한 남자가 아침에 커피와 함께 날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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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처마 아래의 텐트] 

모험 13일 앞 페니어의 왼쪽 가방을 꿰맨 지 3일만에 오른쪽 가방마저 터졌다. 한 번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솜씨 좋게 꿰매 버렸다..jpg
[모험 13일 앞 페니어의 왼쪽 가방을 꿰맨 지 3일만에 오른쪽 가방마저 터졌다. 한 번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솜씨 좋게 꿰매 버렸다.] 

사진 설명은 (너무 길어서) 파일 속성(properties)-요약(summary)탭에 있음.jpg
[안장 가방이 오른쪽의 새로산 물통 케이지의 흰색 물통 끝에 달려 있었고 이처럼 큰 물통을 꼽기 위해 안장 가방을 본체 앞 두 가로 철봉 사이에 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안장 가방 내의 단단한 플라스틱 널빤지 때문에 그 사이에 들어가질 않아 이것을 도려내고 그래도 벨크로(일명 찍찍이) 걸이 길이가 부족해 미리 준비해온 여분 벨크로를 덧대어 안장 가방과 추가 물통 케이지도 잘 달 수 있었다.] 

자전거를 달리다 보니 드디어 밀라노 일대의 평지가 끝나고 길 멀리 앞에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륙 지방인 밀라노에서 친퀘테레가 있는 해안가로 가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북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한다. 자전거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주변에 눈은 점점 많아졌다. 산에 다다랐을 때 이미 해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은 이 산들 어딘가에서 새 하얀 눈에 둘러 쌓인 채 캠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새 하얀 눈이 뒤덮인 산과 중간중간 나타나는 조밀히 밀집된 아기자기한 마을들, 그리고 그 속을 고독히 달리는 자전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고 싶지만 이미 다소 어두워져 빛도 없고 어차피 산중에서 야영할 것인데 내일 밝은 낮에 촬영하면 될 것 같아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역시 아직 초보자다. 하루에 얼마나 달릴지, 얼마나 밤 늦게까지 달릴 수 있는지 아직 개념이 없는 나는 캄캄한 밤중에 결국 도로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나버렸고 내리막길의 짜릿함에 신이나 마음껏 달려 내려와 금새 밀라노 남쪽 해안 도시 제노바에 도착해버렸다. 이제 그 웅장한 산의 경관도 없고 새하얀 눈도 없고 작고 오래된 시골 마을도 없다. 

저 멀리 산이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jpg
[저 멀리 산이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북부 아펜니노 산맥에 접어들고 있다. 아직은 눈이 별로 없다..JPG
[북부 아펜니노 산맥에 접어들고 있다. 아직은 눈이 별로 없다. ]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내리막길의 엄청난 스릴을 즐겼고 여태 최고속도 기록 시속 38.3km도 시속 49.4km로 갱신했다. 한 번은 구불구불 내리막길을 한 번도 멈춤 없이 약 2~30분간 내려오는 동안 새로운 마을 표지판만 대여섯 번은 본 것 같다. 
사실 이런 구불구불한 길을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무거운 자전거 본체를 기울여 빠르게 코너를 돌다가 작은 돌멩이라도 한번 잘못 밟으면 자전거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토바이처럼 묵직한 자전거를 요리조리 기울이며, 산을 오르느라 뜨거워진 몸이 바람을 가르는 이 느낌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해안 도시인 제노바는 온통 언덕이다. 가파른 언덕이나 절벽 끝에 지어진 건물이 많다.jpg 
[해안 도시인 제노바는 온통 언덕이다. 가파른 언덕이나 절벽 끝에 지어진 건물이 많다.]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


2012년 7월 7일 토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3)


4. 야영도 자전거 정비도 직접 해본 적 없는 생초보자

비가 조금 온 첫 야영 후 아침.JPG비가 조금 온 첫 야영 후 아침

간밤에 사람 두 명이 개 한 마리 데리고 텐트 옆을 지나갔지만 별일 없었다. 다만 개가 지나가면서 크게 짖어대어 혹여나 개 주인이 개 끈을 놓치지 걱정했다. 만약 자고 있는데 정말 짐승이 달려들면 어떡하지? 어젯밤 개가 지나가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텐트 밖에 있던 신발을 텐트 안으로 들여 놓았고 맥가이버 칼을 파카 주머니 안에 넣고 잤다. 
첫 야영 후 모험 13일의 첫 아침은 그리 상쾌하지 않다. 지난 12일간 밀라노는 너무나도 맑아 햇볕은 따사롭게 내리쬈고 지난 2월 초의 유럽 강추위는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본격적인 여행 시작과 동시에 일기예보는 좋지 않다. 아침에 약간의 비가 내렸고 날은 흐리다. 일어나서 보니 자전거 앞 페니어 왼쪽 가방 아랫부분이 터져있다.

터진 앞 페니어 오른쪽 가방을 철사로 꿰매었다.JPG
터진 앞 페니어 오른쪽 가방을 철사로 꿰메었다.

아직 자전거 제대로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방이 터지면 어쩌란 말인가. 아마도 앞 짐받이가 문제다. 자전거 여행용이 아닌 짐받이 옆에 페니어 가방이 바퀴에 닫지 않도록 U자 모양의 주물을 하나 덧댄 것이었다. 비용은 총 20유로밖에 들지 않았고 보통의 자전거 여행용 짐받이 가격이 70유로에서 120유로 정도 임을 감안하면 저렴해서 좋긴 한데 이 U자 모양의 주물이 페니어 가방을 제대로 막지 못해 자전거 후진 시 페니어 가방에 앞바퀴살이 걸리면서 뜯어진 모양이다. 
단순한 모양의 둥근 가방이라면 바퀴살이 스쳐 지나갈 텐데 이 건 안쪽 편의 단단한 플라스틱 널빤지에 피륙이 박음질 되어있는 것이라 이 플라스틱 널빤지가 바퀴살 넘어로 들어가 걸리게 되면 제대로 걸리는 거다. 사실 앞 짐받이든 앞 페니어든 둘 중 하나만 좋은 제품이었으면 이런 문제는 없을 텐데, 저렴하게 여행을 해야 하니 이런 일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일요일이기도 하고 환불 또는 교환하러 하루 더 써가면서 이 지긋지긋한 밀라노를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다행이 전날 공사 현장에서 필요할까 싶어 인부에게 부탁해 받은 철사가 있어 단단한 플라스틱 널빤지에 꿰매는 거라 쉽진않지만 냉큼 꿰매 버렸다. 
앞으로 조심히만 다룬다면 당분간 문제는 없을 것 같고 문제가 되면 그때 가서 새 제품을 구입하면 될 것 같다. 다만 뒤 페니어는 방수이지만 저예산 때문에 구입한 방수가 아닌 앞 페니어 때문에 걱정이 된다. 비 오면 그때 가서 어떻게든 해결 할 것이다. 자, 비도 그쳤고, 페니어도 수리했고, 텐트도 다 개어 모든 짐을 다시 꾸렸다. 때는 일요일 두 시 정도였고 전날 이리노 목사님께 인사 드리고 나와 몇 시간을 헤맸지만 고작 그 근처였다.

전날 교회에서 이 목사님만 뵙고 한영진 집사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전화를 건다. 또 한발 늦었다. 한 집사님은 이미 댁에 들어가는 중이다. 대신 아직 교회에 아내가 있고 음식이 있으니 가서 자기 아내 찾아 밥 먹고 출발하라고 하셔 한 집사님 대신 아주머니께라도 인사 드리겠다고 다시 교회로 향한다. 가는데 5분밖에 안 걸렸다. 어젯밤 몇 시간을 헤매서 왔는데 단순간에 되돌아오다니, 앞으로 텐트 칠 장소 찾는데 고생길이 훤하다. 도착하니 한 집사님네 아주머니께서 환영해주시고 이미 점심 시간이 끝나는 때지만 간단하게 미역국과 김치로 한 상을 차려 주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모국의 맛이다. 교회는 자기 부지와 담을 갖고 있고 그 담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건물 벽에 세워놓고 바로 문 안에 들어가 식사를 한다는 게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동령아 너 참 소심해졌구나.

그런데 이 뜨거운 미역국 한 술 떠 입 안에 넘기니 시야가 맑아지고 정신이 깨는 듯 한 느낌이다. 당연히 밖에 교회 분들이 계시는데 자전거의 안전은 틀림없는 것 아닌 가. 이에 밥 세 공기는 후딱 해치워 버렸다. 음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을 떠나온 이래 1.5년간의 먹었던 음식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음식은 기효순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음식이다. 그 이유는 달지 않고 조미료가 전혀 안 들어간 우리 순수한 고향의 맛이었다. 부모님께서 시골스러운 음식을 좋아하셔서 부모님 댁에는 조미료가 전혀 없다. 
요즘 슈퍼에서 보이는 무화학물 천연 조미료라고 선전하는 그런 제품조차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나와 살았던 나는 지난 어느 날을 기억한다.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왔고 저녁 반찬에 우리집 뒷마당 땅 속 장독에서 잘 숙성된 배추김치와 무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른 반찬은 전혀 먹을 수 조차 없었다. 김치는 반찬이라고 여겨왔던 난 그때 깨달았다. 김치도 요리다. 그 순수한 김치의 맛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인데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맛을 알까. 현재 우리나라 많은 가정이 조미료 맛에 익숙해졌고, 식당 음식은 당연히 조미료가 들어간다. 심지어 몇 해 전부터는 식당 음식이 점점 달아지기 시작했다.

싸고 대충 빨리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잠깐 맞추기 위한 것 같은데, 이건 대한민국 음식 역사의 위기의 순간이다. 잠깐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위대한 우리 음식에 대해 걱정을 해 보았다. 배도 든든해졌고 한 집사님네 아주머니께도 인사도 드렸다. 주변에 계시던 분들의 따뜻한 성원을 받으며 이제 제대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밀라노, 진짜 안녕이다. 
좋은 분들이 많아 넌 그나마 내 기억 속에 나쁘지만은 않게 남아 있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밀라노 남쪽 아래 바닷가에 위치한 제노바에서 동쪽으로 가면 친퀘테레(Cinque Terre)에 가기 위해서이고 멀리는 로마도 갈 것이다. 
뚜렷한 일정 없이 출발지와 도착지만 정해놓고 여행 하는 건 9년 전 국내 무전 여행과 다를 게 없다. 밀라노에 와서도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동쪽의 베로나와 베네치아를 지나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을 거쳐 덴마크로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밀라노에 와서 이탈리아에 왔으니 유럽의 여러 문화 문명에 큰 기여를 한 로마는 꼭 가보야 한다는 권고에 덴마크는 북쪽인데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아름다운 해안절벽 마을 친퀘테레라는 곳이 있다 하니 친퀘테레를 첫 목적지로 정했다. 

지도상 거리는 대략 230km. 며칠이나 걸릴까, 한 번 달려 보자. 이런 거창해 보이는 여행은 보통 여행 전문가나 최소 연습을 해보고 떠난 다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모든지 잘해 나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한 난 여행 전문가도 아니요, 야영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요, 자전거 전문가도 아니요, 심지어 자전거를 오래 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 무전여행 당시 자전거로 일주일간 한라산을 넘어 반달 모양으로 제주도 일주를 한 적은 있다(돈 없이 제주도는 어떻게 가고 자전거는 어디서 났을까?). 

이 여행을 위하여 덴마크에 오기 전에 서울의 한 자전거 가게에서 미리 자전거를 구입할 때의 일이다. ”유럽에 가져가서 자전거로 유럽 한 바퀴 돌아 보려고요.” ”에이, 자전거 제대로 타본 적도 없는 분이 힘들 텐데.” ”교환학생 한 학기 동안 연습 좀 해봐야죠.” 덴마크에 있는 동안 몇 번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모두 어찌하여, 어쩌면 게을러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금 가지고 가는 이 텐트도 덴마크에서 만난 프랑스 교환학생 친구 악튀(Arthur)와 함께 자전거로 여행하자며 같이 부담하여 구입한 것이지만 악튀만 몇 번 이 텐트를 사용하고 난 어제 처음 쓴 거다. 즉 야영도 어젯밤이 처음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오래 달릴 차례다. 과연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예전에 군대에서 한자자격증2급 시험 준비할 때 뒤늦게 준비하는 바람에 시험날까지 짧은 기간 안에 다 공부할 자신이 없고 떨어질 가능성이 커서 처음엔 사람들에게 한자2급 준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피자가게에서 일하는 마르코.JPG
피자가게에서 일하는 마르코

말해놓고 떨어지면 창피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하고 덴마크로 돌아오겠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녔다. 그런데 이건 지역구도 전국구 동네방네도 아니라 세계구 동네방네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동령아, 중도하차하면 얼굴 못 드는 거야. 아자! 한번 가 보자! 모험 13일 오늘, 흐린 하늘 아래 63km를 힘껏 달리다 보니 산죠르죠디로멜리나(San Giorgio di Lomellina)까지 왔다. 
밀라노 일대 이곳은 논밭만 있는 광활한 평지다. 일기예보상 비가 올 수도 있고 이런 평야에서 남의 시선 피해 텐트 칠 장소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저녁으로 피자 하나 사먹고 좋은 잠자리를 물어보기 위해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논밭만 있다가 잠깐 나타난 아주 작은, 호텔은 당연히 없고 이탈리아에 그 흔하고 흔한 피자가게조차 한두 개밖에 없을 것 같은 이 작은 동네의 피지가게 앞에 자전거 주차하는데 자물쇠로 묶고 또 묶으면서 유별을 떠는 내 모습에 주인과 종업원은 기가 찼을 것이다. 피자를 먹고 있는데 종업원 마르코(Marco)가 이 피자를 대접한다고 즉 대신 지불한다고 주인집 아줌마가 일러준다. 
먼저 호의를 보인 첫 현지인이다! 이 감격은 금세 보답의 의무감으로 맥주를 사려 했지만 기어코 나의 선의는 받아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싶지만 부모와 함께 살기 때문에 다소 곤란하다며 주인집 아저씨한테 말해서 피자가게 뒤 장작 헛간 지붕아래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행이 오늘은 쉽게 잠자리를 찾았다(좌표 45.172086, 8.790717).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가야할 마젠타(Magenta)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 표지판은 가끔 불명확하다.JPG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가야할 마젠타(Magenta)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 표지판은 가끔 불명확하다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3)



4. 야영도 자전거 정비도 직접 해본 적 없는 생초보자
비가 조금 온 첫 야영 후 아침.JPG비가 조금 온 첫 야영 후 아침
간밤에 사람 두 명이 개 한 마리 데리고 텐트 옆을 지나갔지만 별일 없었다. 다만 개가 지나가면서 크게 짖어대어 혹여나 개 주인이 개 끈을 놓치지 걱정했다. 만약 자고 있는데 정말 짐승이 달려들면 어떡하지? 어젯밤 개가 지나가고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텐트 밖에 있던 신발을 텐트 안으로 들여 놓았고 맥가이버 칼을 파카 주머니 안에 넣고 잤다. 
첫 야영 후 모험 13일의 첫 아침은 그리 상쾌하지 않다. 지난 12일간 밀라노는 너무나도 맑아 햇볕은 따사롭게 내리쬈고 지난 2월 초의 유럽 강추위는 온데간데없다. 그런데 본격적인 여행 시작과 동시에 일기예보는 좋지 않다. 아침에 약간의 비가 내렸고 날은 흐리다. 일어나서 보니 자전거 앞 페니어 왼쪽 가방 아랫부분이 터져있다.
터진 앞 페니어 오른쪽 가방을 철사로 꿰매었다.JPG
터진 앞 페니어 오른쪽 가방을 철사로 꿰메었다.
아직 자전거 제대로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방이 터지면 어쩌란 말인가. 아마도 앞 짐받이가 문제다. 자전거 여행용이 아닌 짐받이 옆에 페니어 가방이 바퀴에 닫지 않도록 U자 모양의 주물을 하나 덧댄 것이었다. 비용은 총 20유로밖에 들지 않았고 보통의 자전거 여행용 짐받이 가격이 70유로에서 120유로 정도 임을 감안하면 저렴해서 좋긴 한데 이 U자 모양의 주물이 페니어 가방을 제대로 막지 못해 자전거 후진 시 페니어 가방에 앞바퀴살이 걸리면서 뜯어진 모양이다. 
단순한 모양의 둥근 가방이라면 바퀴살이 스쳐 지나갈 텐데 이 건 안쪽 편의 단단한 플라스틱 널빤지에 피륙이 박음질 되어있는 것이라 이 플라스틱 널빤지가 바퀴살 넘어로 들어가 걸리게 되면 제대로 걸리는 거다. 사실 앞 짐받이든 앞 페니어든 둘 중 하나만 좋은 제품이었으면 이런 문제는 없을 텐데, 저렴하게 여행을 해야 하니 이런 일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일요일이기도 하고 환불 또는 교환하러 하루 더 써가면서 이 지긋지긋한 밀라노를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다행이 전날 공사 현장에서 필요할까 싶어 인부에게 부탁해 받은 철사가 있어 단단한 플라스틱 널빤지에 꿰매는 거라 쉽진않지만 냉큼 꿰매 버렸다. 
앞으로 조심히만 다룬다면 당분간 문제는 없을 것 같고 문제가 되면 그때 가서 새 제품을 구입하면 될 것 같다. 다만 뒤 페니어는 방수이지만 저예산 때문에 구입한 방수가 아닌 앞 페니어 때문에 걱정이 된다. 비 오면 그때 가서 어떻게든 해결 할 것이다. 자, 비도 그쳤고, 페니어도 수리했고, 텐트도 다 개어 모든 짐을 다시 꾸렸다. 때는 일요일 두 시 정도였고 전날 이리노 목사님께 인사 드리고 나와 몇 시간을 헤맸지만 고작 그 근처였다. 
전날 교회에서 이 목사님만 뵙고 한영진 집사님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전화를 건다. 또 한발 늦었다. 한 집사님은 이미 댁에 들어가는 중이다. 대신 아직 교회에 아내가 있고 음식이 있으니 가서 자기 아내 찾아 밥 먹고 출발하라고 하셔 한 집사님 대신 아주머니께라도 인사 드리겠다고 다시 교회로 향한다. 가는데 5분밖에 안 걸렸다. 어젯밤 몇 시간을 헤매서 왔는데 단순간에 되돌아오다니, 앞으로 텐트 칠 장소 찾는데 고생길이 훤하다. 도착하니 한 집사님네 아주머니께서 환영해주시고 이미 점심 시간이 끝나는 때지만 간단하게 미역국과 김치로 한 상을 차려 주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모국의 맛이다. 교회는 자기 부지와 담을 갖고 있고 그 담 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자전거를 건물 벽에 세워놓고 바로 문 안에 들어가 식사를 한다는 게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동령아 너 참 소심해졌구나. 
그런데 이 뜨거운 미역국 한 술 떠 입 안에 넘기니 시야가 맑아지고 정신이 깨는 듯 한 느낌이다. 당연히 밖에 교회 분들이 계시는데 자전거의 안전은 틀림없는 것 아닌 가. 이에 밥 세 공기는 후딱 해치워 버렸다. 음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을 떠나온 이래 1.5년간의 먹었던 음식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음식은 기효순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음식이다. 그 이유는 달지 않고 조미료가 전혀 안 들어간 우리 순수한 고향의 맛이었다. 부모님께서 시골스러운 음식을 좋아하셔서 부모님 댁에는 조미료가 전혀 없다. 
요즘 슈퍼에서 보이는 무화학물 천연 조미료라고 선전하는 그런 제품조차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에서 나와 살았던 나는 지난 어느 날을 기억한다.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왔고 저녁 반찬에 우리집 뒷마당 땅 속 장독에서 잘 숙성된 배추김치와 무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른 반찬은 전혀 먹을 수 조차 없었다. 김치는 반찬이라고 여겨왔던 난 그때 깨달았다. 김치도 요리다. 그 순수한 김치의 맛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눈가에 눈물이 고일 정도인데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맛을 알까. 현재 우리나라 많은 가정이 조미료 맛에 익숙해졌고, 식당 음식은 당연히 조미료가 들어간다. 심지어 몇 해 전부터는 식당 음식이 점점 달아지기 시작했다.
싸고 대충 빨리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잠깐 맞추기 위한 것 같은데, 이건 대한민국 음식 역사의 위기의 순간이다. 잠깐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위대한 우리 음식에 대해 걱정을 해 보았다. 배도 든든해졌고 한 집사님네 아주머니께도 인사도 드렸다. 주변에 계시던 분들의 따뜻한 성원을 받으며 이제 제대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한다. 밀라노, 진짜 안녕이다. 
좋은 분들이 많아 넌 그나마 내 기억 속에 나쁘지만은 않게 남아 있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밀라노 남쪽 아래 바닷가에 위치한 제노바에서 동쪽으로 가면 친퀘테레(Cinque Terre)에 가기 위해서이고 멀리는 로마도 갈 것이다. 
뚜렷한 일정 없이 출발지와 도착지만 정해놓고 여행 하는 건 9년 전 국내 무전 여행과 다를 게 없다. 밀라노에 와서도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동쪽의 베로나와 베네치아를 지나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을 거쳐 덴마크로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밀라노에 와서 이탈리아에 왔으니 유럽의 여러 문화 문명에 큰 기여를 한 로마는 꼭 가보야 한다는 권고에 덴마크는 북쪽인데도 불구하고 남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는 길 바로 옆에 있는 다섯 개의 아름다운 해안절벽 마을 친퀘테레라는 곳이 있다 하니 친퀘테레를 첫 목적지로 정했다. 
지도상 거리는 대략 230km. 며칠이나 걸릴까, 한 번 달려 보자. 이런 거창해 보이는 여행은 보통 여행 전문가나 최소 연습을 해보고 떠난 다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모든지 잘해 나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한 난 여행 전문가도 아니요, 야영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요, 자전거 전문가도 아니요, 심지어 자전거를 오래 타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 무전여행 당시 자전거로 일주일간 한라산을 넘어 반달 모양으로 제주도 일주를 한 적은 있다(돈 없이 제주도는 어떻게 가고 자전거는 어디서 났을까?). 
이 여행을 위하여 덴마크에 오기 전에 서울의 한 자전거 가게에서 미리 자전거를 구입할 때의 일이다. ”유럽에 가져가서 자전거로 유럽 한 바퀴 돌아 보려고요.” ”에이, 자전거 제대로 타본 적도 없는 분이 힘들 텐데.” ”교환학생 한 학기 동안 연습 좀 해봐야죠.” 덴마크에 있는 동안 몇 번 자전거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모두 어찌하여, 어쩌면 게을러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금 가지고 가는 이 텐트도 덴마크에서 만난 프랑스 교환학생 친구 악튀(Arthur)와 함께 자전거로 여행하자며 같이 부담하여 구입한 것이지만 악튀만 몇 번 이 텐트를 사용하고 난 어제 처음 쓴 거다. 즉 야영도 어젯밤이 처음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오래 달릴 차례다. 과연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예전에 군대에서 한자자격증2급 시험 준비할 때 뒤늦게 준비하는 바람에 시험날까지 짧은 기간 안에 다 공부할 자신이 없고 떨어질 가능성이 커서 처음엔 사람들에게 한자2급 준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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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가게에서 일하는 마르코
말해놓고 떨어지면 창피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하고 덴마크로 돌아오겠다고 동네방네 소문 다 내고 다녔다. 그런데 이건 지역구도 전국구 동네방네도 아니라 세계구 동네방네다. 남아일언중천금이다 동령아, 중도하차하면 얼굴 못 드는 거야. 아자! 한번 가 보자! 모험 13일 오늘, 흐린 하늘 아래 63km를 힘껏 달리다 보니 산죠르죠디로멜리나(San Giorgio di Lomellina)까지 왔다. 
밀라노 일대 이곳은 논밭만 있는 광활한 평지다. 일기예보상 비가 올 수도 있고 이런 평야에서 남의 시선 피해 텐트 칠 장소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저녁으로 피자 하나 사먹고 좋은 잠자리를 물어보기 위해 피자가게에 들어갔다. 논밭만 있다가 잠깐 나타난 아주 작은, 호텔은 당연히 없고 이탈리아에 그 흔하고 흔한 피자가게조차 한두 개밖에 없을 것 같은 이 작은 동네의 피지가게 앞에 자전거 주차하는데 자물쇠로 묶고 또 묶으면서 유별을 떠는 내 모습에 주인과 종업원은 기가 찼을 것이다. 피자를 먹고 있는데 종업원 마르코(Marco)가 이 피자를 대접한다고 즉 대신 지불한다고 주인집 아줌마가 일러준다. 
먼저 호의를 보인 첫 현지인이다! 이 감격은 금세 보답의 의무감으로 맥주를 사려 했지만 기어코 나의 선의는 받아지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싶지만 부모와 함께 살기 때문에 다소 곤란하다며 주인집 아저씨한테 말해서 피자가게 뒤 장작 헛간 지붕아래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행이 오늘은 쉽게 잠자리를 찾았다(좌표 45.172086, 8.790717). ?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가야할 마젠타(Magenta)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 표지판은 가끔 불명확하다.JPG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가야할 마젠타(Magenta)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이탈리아 표지판은 가끔 불명확하다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2)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2)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의 유럽 자전거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3. 포기할 수 없는 도전 그리고 감사한 분들

손발이 떨렸다.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정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구나. 다시 바로 데카틀론 안으로 들어가서 이 상황을 알렸고 그들은 나 대신 경찰서에 전화해줬다. 전화상으로 경찰은 내가 경찰서에 가야 한다며 여기서 가까운 경찰서 두 군데를 알려줬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둘 중 더 가까운 경찰서로 달렸다. 도착하여 건물 정문이 잠겨있음을 확인할 때 경찰관 한 명이 문을 열며 말 한 마디 대뜸 던지고 들어갔다. "끝났다." 인터폰 벨을 눌러보았으나 그 너머에 있는 경찰관도 "끝났다."라고만 말하고 인터폰을 끊으려 하였다. 아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야간에도 근무하는 경찰서나 그런 지점은 당연히 있을 것인데 끝났으면 어떻게 하라는 다른 대안을 줄 관심도 없다는 것인가?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경찰관이 나보고 여기로 오라고 했다.”라고 재차 반복해 외쳐 댔다. 그제서야 잠겨있는 문 안에 있던 경찰관은 밖으로 나와 내 얘기를 들었다. 
결국 조금 전 데카틀론에서 들은 나머지 다른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꼬우면 출세해야지 다른 곳에 가면 해결해 주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나왔던 후드자켓은 자전거와 사라져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이끌고 다음 경찰서에 갔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 간단한 보고서 작성을 마쳤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증명서를 받고 이제 끝났으니 가보란다. “혹시 내 자전거가 무슨 색깔인지 안 궁금해?” “응.” 그렇다. 난 여태까지 허황된 소망과 춥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축제에 흥분한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이 곳에 왔던 것이다. 
자전거 색깔조차 궁금하지 않다는 경찰관에게 “내 자전거 사진 줄까”라고 재차 물어본 난 참 미련했다.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올린과 친구들은 곧 집에서 나올 참이었고, 난 와이파이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릴 셈으로 두오모 광장 앞 버거킹으로 향했다. 날씨는 더욱 서늘했고 점차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버거킹에서 기다리다 심지어 잠까지 들었던 나는 친구들을 아직 만나기 전에 결국 집에 혼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낮에만 해도 밀라노와 난 함께 들떴는데, 내 출전을 경축하는 술자리를 잔뜩 기대했는데, 난 밀라노로부터 등을 돌렸다. 
사실 술을 좋아한다. 덴마크에서 김치 한 번도, 옷 한 벌도 안 사 먹고, 안 사 입은 대신, 덴마크에서 일을 갖고 수입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술은 사 마셨다. 친구들과 술을 즐기는 건 한국 친구들과나 외국 친구들과나 다를 게 없이 즐겁다. 
경찰서에서 보고서 작성을 다 마친 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여겼지만 그 엄청난 피로는 정말 대단했다. 집에 돌아와서 침낭을 피자마자 바로 그 위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즉 모험 6일, 비록 자전거가 도둑맞았지만 올린의 생활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날 까지만 올린 집에서 묵고 월요일인 모험 7일엔 올린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비록 분해도 자전거와 샀던 모든 장비를 다시 사야 했다. 이젠 정말 예산 문제였다. 단순히 아까운 호화 호텔이 싫어 카우치서핑을 찾았던 것과 달리 이제 아까지 않으면 여행을 끝낼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무료 숙박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밀라노 한인센터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을 하여 사정을 알렸고 한인센터에서 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난 안전한 곳에 지붕만 있으면 매트리스와 침낭 깔고 잘 수 있다고 말씀 드렸고 목사님께서는 다음날 오라고 하셨다. 모험 7일, 한 상자 가득 들은 짐, 뚱뚱해진 배낭과 이키아 가방 하나 들고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가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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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
이 목사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나가시고 한영진 집사님께서 날 맞이해 주셨다. 잠시 대화 끝에 한 집사님께서는 자기 집 안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줄 상황이 안되고 그렇다고 찬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안쓰럽기 때문에 차라리 따신 한인민박에서 아침밥 든든히 먹으라며 민박집에서 며칠 묵을 치의 돈을 건네주셨다. 이렇게 큰 돈을 받고자 온 것은 아니고 울타리와 지붕만 있으면 되는데, 결국 한 집사님의 언변에 못 이겨 봉투를 받고 교회를 나왔다. 한 집사님은 유쾌하신 분이셨다. 근처 바에 들어가 주스와 이탈리아 식의 간소한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난 다시 처음 이틀을 지낸 민박집을 향했지만 이 돈이라도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이번의 검색어는 '밀라노 한인 학생회'이다. 역시 구글신 아니 던가. 우리 구글신께서는 밀라노 한인 학생들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담긴 명단을 찾아주었다. 그 중에 첫 번째 남자이름의 학생인 김명식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인정이 많다. 흔쾌히 약속 장소를 정했고 이날은 김명식씨와 함께 잤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 늦게 퇴근하는 정말 바쁜 박사 유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날 즈음에 집 하수구가 막혀 여러모로 손님을 들이기가 불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음날은 다른 잘 곳을 찾기로 했다. 
이렇게 잠깐 잠깐 머무르는 방법으로는 숙박비는 아껴도 시간낭비가 심했다. 어제 오늘 음식을 잘 해먹지도 못해 여러모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벌써 모험 8일인데, 차라리 호스텔 하나 잡아 다시 자전거와 모든 장비를 준비하고 빨리 출발해 버릴까…. 오늘 하루 더 찾아보자. 밀라노로도 카이스트에서 교환학생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이스트 국제협렵팀에 내 사정에 대한 기술과 함께 교환학생 온 학생들 연락처를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다음엔 밀라노 총영사관에 전화했다. 
총영사관의 한미영 행정원은 총영사관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적당한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고 날 위로해주며 총영사관 당직 전화번호, 민박집 전화번호와 함께 밀라노 한국순교자천주교회의 김지현 요한 신부님 연락처를 알려줬다. 좀더 힘을 내자. 김 신부님께 전화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잠시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제발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로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한 신자부부네 집에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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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화상통화
아, 드디어 안정된 거처를 구했다! 그 부부는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였다. 바로 전화를 걸어 감사하다며, 지금 운영하는 한국식품점 가게에 찾아가 직접 인사 드리겠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 부모님께 전화할 차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먼저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전화를 거셨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어머니께서는 왠지 내가 페이스북에 있을 것 같아 오래간만에 들어와봤고 페이스북에 영상통화 기능이 있길래 한 번 클릭해 본 것이라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오래간만에 아들과 영상통화하여 그저 행복해 하셨다. 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도둑 맞은 것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으셨다. 그래 이것도 어머니 말씀대로 큰 경험이다. 
가족처럼 챙져주신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JPG
가족처럼 챙겨주신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
돈 몇 푼어치 잃어버린 게 뭐 대수이랴. 난 우리 어머니로부터 ‘전화위복’을 배웠다. 10살이던 어느 날 학교 숙제로 종이로 된 자동차를 만들었다. 실수로 어머니께서 밟으셔서 자동차를 망쳤고 난 어린 마음에 울었다. 어머니께선 날 달래며 같이 다시 만들자고 설득하셨고 우리는 당연히 더 멋진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때 어머니께서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한 마디를 말씀해 주셨다. '전화위복' 이 말은 해가 지날수록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점점 더 파고 들어왔다. 모든 일은 결국 다 잘 될 거야.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날 위해서 돌아간다고 굳게 믿는다. 다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날 위해서'는 돌아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화위복'은 더욱 증명만 될 뿐이었다. 후회할 법한 일이 생겨도 그것은 더 좋은 것을 부르는 나비효과였다. 삶에 있어서 후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다시 행복해 지면 된다. 왜냐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걸 아니깐. 영화 선리기연의 손오공 역 주성치가 말했다.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역시 후회하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나에게 일어난 도난 사고도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고 더 좋은 결과를 유래하는 사건이다. 
언제나 즐거운 앞날이 기대된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 아저씨는 남는 방 두 개로 가끔 민박집처럼 운영하였고 신부님께서는 내 숙박에 대해 금전적 지원을 해주시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흘 머무르는 동안 아주머니 아저씨께서는 날 가족처럼 매우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모험 12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밀라노를 떠나자. 김 신부님은 일이 있으셔서 직접 찾아 뵙진 못하여 전화로만 인사 드렸고, 이 목사님은 찾아 뵙고 인사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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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든 준비를 갖춘 새 자전거
두 분 다 좋은 말씀 전해 주시며 앞 길의 편안을 빌어주셨고, 난 드디어 첫 야영지를 찾아 나섰다. 적당한 야영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람의 통행이 없고 안전한 곳을 과연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몇 시간 헤맨 끝에 밀라노 시 외곽의 축구장 사이 작은 잔디밭(좌표 45.48915, 9.047371)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과연 안전할까, 누가 와서 야영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모험에 기대와 흥분을 안은 채 별일 없길 바라며 침낭 안에 몸을 맡겼다.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1)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의 유럽 자전거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모든 장비를 갖춘 자전거.JPG
1. 모험의 서곡은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 안이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있고 나는 이탈리아로 가고 있다. 어두컴컴한 창 밖은 앞으로 나의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일이 년 후의 나의 미래까지도... 이제 나에게 집은 없다. 주소 없는 여행자로 세계 속에 나는 내 던져진 것이다. 
이제 나의 집은 텐트이고 이웃은 전 세계 모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새로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랜만에 큰 여행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해서 자전거 타고 약 두세 달 간 덴마크 코펜하겐까지 돌아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KAIST입학이 결정되고 같이 KAIST에 가게 될 친구와 둘이서 그해 가을에 호주로 배낭여행을 떠나 45일을 여행했고, KAIST 1학년이었던 이듬해엔 포항공대에 같은 시기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문 친구와 둘이서 30일 동안 정말 한 푼도 없이 국내 무전여행을 하였다. 이게 2003년이었으니- 나는 03학번이다- 2012년인 지금으로부터 보면 벌써 9년 전이다. 
아직도 호주, 국내무전여행 둘 다 모두 생생한데 그래도 오랜만이다. 2010년 가을학기에 덴마크공과대학(DTU, Technical University of Denmark)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지난 2월까지 계속 덴마크에 거주하다가 이제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혹은 취업하여 일에 전념하기 전에 9년만 에 큰 여행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사실 자전거로 유럽 여행하는 것은 덴마크에 오기 전부터 꿈꿔오던 것이었고, 덴마크에 오는 것이 결정되고 나서는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었다.
덴마크는 물가가 비싸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미리 자전거를 하나 구입하여 덴마크에 올 때 가지고 왔다. 게다가 교환학기가 끝나면 2011년 1~2월의 겨울이기 때문에 중학교 때 입고 안 입던 오리털 파카, 스웨터 등도 모두 챙겨왔다. 
하지만 계획보다 일년 후인 2012년 2월에 난 지금 시작하고 있다. 지난 두 여행과 더불어 이번 여행을 하게끔 영향을 준 인물이 두 사람 있다. 바로 이찬양씨와 문종성씨다. 호주배낭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는 아직 영어도 못하고 해외 나가본 적도 없고 오래 여행해본 적도 없어서 사실 호주에서의 홈스테이를 고려했었다. 그런데 그 때 여행을 즐겨 하던 -현재는 전문 여행가가 되었지만- 이찬양씨의 홈페이지를 통해 용기를 얻어 긴 배낭여행을 단행하게 됐다. 
무전여행 결정 시에도 역시 이찬양씨 홈페이지로부터 많은 용기를 받았다. 그런 이찬양씨가 2007년에 자전거로 세계일주여행을 떠났고, 그의 자전거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역시 엄청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던 도중 2011년 가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전거 여행 중이던 문종성씨를 만났다. 그로부터 생생하게 들었던 수많은 자전거 여행의 아름다운 일화들은 날 무척이나 감동시켰고 이번 자전거 여행을 결행시키는 결정타가 되었다. 
그 아름다운 일화들은 거의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고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나의 도전에 성공하겠다는 목적의식도 물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삶을 이해하고 배우며 견문을 넓히는데 있다. 그런데 단지 자전거로만 하는 큰 여행이 아니다. 이찬양씨 문종성씨가 그렇듯 나 역시 텐트, 침낭 등 여러 장비와 함께 캠핑하며 여행할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저가항공 이지젯 비행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온 자전거와 덴마크에서 프랑스 친구와 같이 여행할 때 쓰던 텐트, 침낭, 자동충전식 에어매트리스, 중학교때 입던 겨울 옷들 등이 함께 타고 있다. 비행기가 코펜하겐 공항을 뜬지 두 시간이 다 되가 곧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착륙하려 한다. 지금은 2012년 2월 21일 밤 10시 30분경, 나의 서곡도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마치고 이제 나의 모험은 시작된다. 오늘이 모험 첫째 날이다. 

 2. 채비를 다 갖춘 떠나기 전날 자전거와 장비 모든 걸 도둑맞다니
 밀란 말펜사 공항에 도착한 나에겐 짐이 많았다. 자전거를 포장한 자전거 박스, 짐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배낭 그리고 거기에 모자라 한 박스 가득한 짐. 나는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자전거 뒷짐받이는 이미 한국에서 장착해 왔기 때문에 앞패니어(자전거 바퀴 양쪽에 다는 가방)를 달기 위한 앞짐받이를 알아봐야 했고 물론 앞패니어와 뒷패니어도 역시 구입해야 했다. 또한 캠핑스토브 및 가스연료 등 캠핑장비 몇 가지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며칠간 밀라노에 머물러야 했는데 도난의 염려 때문에 이 많은 짐들을 호스텔에 놔둔 채로 밖을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돈을 좀 쓰더라도 채비가 끝나 떠나기 전까지는 한인민박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룻밤에 30유로라니 엄청난 비용이다. 재작년 덴마크에서 만난 교환학생 친구들끼리 셋이서 독일에 여행 갔을 때 두 명만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나는 몰래 들어가 빈 침대에서 이불 없이 자고 아침도 번갈아 가며 먹으며 점심, 저녁 치 빵, 쨈, 햄까지 몰래 싸가지고 나오며 여행하던 나 같은 참으로 저렴한 여행자에게 한식으로 아침상을 차려주는 한인민박은 말 그대로 초호화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덴마크에서 1.5년 살면서 김치 한 번 사 먹어본 적 없고 한국식당에 내가 먹고 싶어서 간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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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출신의 한인민박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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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민박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
밀라노 도착한 다음날부터 자전거 가게들을 방문하며 자전거장비 가격을 알아보는데 캠핑장비까지 사려면 이게 하루 이틀 안에 바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인민박은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비용이 안 드는 카우치서핑(현지인 집의 소파에서 숙박비 없이 지내며 같이 음식을 해먹거나 이야기 하는 등의 교류를 하는 일. 현지인을 호스트라고 하고 방문하는 여행객을 카우치서퍼라고 한다)을 알아봤고 다행이 호스트를 한 명 찾아서 밀라노 셋째, 넷째 날 밤(즉 모험 셋째, 넷째 날 밤)은 그 호스트 집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호스트랑은 나의 모험 넷째 날 밤까지로 약속했는데 모험 다섯째 날이 밀라노 카니발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고 호스트가 나와 같은 또래이고 유쾌해서 호스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축제 마지막 날 같이 술 마시고 밤새 놀기로 하고 하룻밤 더 있기로 했다. 게다가 며칠 동안 종일 밀라노 자전거 가게만 돌아다니면서 찾은 저렴한 자전거 가게에 맡겨놓은 자전거도 다섯째 날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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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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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의 친구 유린
다섯째 날 자전거를 찾고 스포츠용품점에서 캠핑장비를 구입하고 호스트와 축제를 즐기고 나는 그 다음날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장거리 자전거여행에 보통 많이 쓰는 자전거 뒷패니어가 한 쌍에 110유로가 넘었는데 내가 찾은 자전거 가게는 처음보는 브랜드의 가방에 사용이 약간 불편했지만 품질은 좋아 보이고 가격이 50유로밖에 안됐다. 앞뒤 패니어 함께 생각하면 이미 120유로는 절약한 셈이고 게다가 앞짐받이도 다른 데보다 30~50유로는 저렴하게 구입했다. 
이동거리 등도 함께 측정해주는 자전거 속도계, 안전을 위한 LED 라이트, 물병 케이지를 구입하고 브레이크패드를 갈고 이미 장착된 산악용 1.95인치 두께의 타이어에서 도로에서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1.75인치 두께의 타이어로(속의 튜브를 교체하지 않고 쓸 수 있는 가장 좁은 타이어. 좁을 수록 포장도로에서 빠르다)도 교체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다섯째 날 점심나절 모든 장비를 갖춘 자전거를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챙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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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 자전거 가게에서 구글 번역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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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가게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들
축제 마지막 날을 위해서인지 단지 날 위해서인지 그날 밀라노의 햇살은 얼마나 따스하던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입고 있던 후드자켓은 자전거 패니어에 기분 좋게 넣어 놓고 즐거워 보이는 분장한 사람들 사이로 나 역시 웃으며 유유히 자전거를 몰며 카이롤리 카스텔로(Cairoli Castello) 메트로 역 앞에 있는 스포츠용품점 데카틀론으로 향했다. 데카틀론에 도착한 때는 오후 6시쯤, 그 앞에 커다란 공원이 있고 그 반대편 가까이에 밀라노의 중심거리가 있는데다가 이날이 축제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 주변엔 축제를 즐기러 나온 가족단위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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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맡겨 놓은 동안 관광객으로서
데카틀론 입구 바로 앞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워 자물쇠로 잠그고 들어가 약 한 시간가량 스펀지 매트리스, 랜턴, 등산양말, 작은 온도계와 나침반이 함께 달린 비상용 호루라기 등을 구입하였다. 이제 우리 호스트 친구들과 음주가무 할 차례다. 게다가 내일이면 드디어 출발한다. 들뜬 마음으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저녁이어서 사람은 많았고 밖은 어두웠다. 
어둡고 앞에 사람들이 많아 자전거가 잘 안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여전히 잘 안보이네? 없나? 없나? 설마 없나? 정말 없나? 자전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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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전거 세워놨던 자리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손선혜의 그린랜드, 아이스랜드에 가다(마지막)

손선혜의 그린랜드, 아이스랜드에 가다(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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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를 가나 크고 작은 음악학교가 있는것이 의외의 발견이다. 미술관,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이나라
사람들은 예술에 관심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실내가 따듯하기에 물어보니 도시 전체가 흔하게
많은 뜨거운 지하수로 난방을 하니 물과 전기 값이 안든다고한다. 영국의 물가를 생각해본다.
 2011년 5월에 문을 열었다는 건물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고 바닷가에 있는 콘서트홀의 이름은 하프라는
뜻의 하르파다. 초 현대적인 디자인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엘사의 친구이자 아이스랜드의 조각가가 디자인한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작품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각가의 디자인이었으니까.
항구에 자리잡은 수도로 항구에는 크고 작은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다. 고래구경 시켜 준다고 호객을 하는
사람들의 경쟁도 볼만하다. 작은 배를 타고 항구를 벗어나 한시간 쯤 넓은 바다를 향해 나가서 대형의 밍키고래도
보았고 이삼십마리의 돌고래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는 행운도 있었다. 배의 한쪽 아래로 들어갔다 다른 쪽으로
나오며 웃는듯 보이는 얼굴의 돌고래들이 노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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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핀이라는 이름의 새들은 아주 재미있게 생겼다. 부리가 크고 부리와 몸의 색갈이 각양각색으로 되어 있는
자그마한 새다. 이들만 모여 사는 섬에 가 보니 흙으로 된 벽에 수 없이 많이 뚤려 있는 구멍들은 그들의 집이다.
많은 새들이 모여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이 많은 사람보고 새처럼 짹짹거린다는
표현이 생겼나보다.
물에 여러가지 미네랄이 듬뿍 들어 있어 피부병을 고친다는 스파, 블루라군(Blue Lagoon)은 시내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다. 가까이 접근하니 유황냄새가 심하고 흰색의 유황(sulfur)으로 인해서 물 빛이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것 같아 보였다. 섭씨 39도의 물에 주위는 4 미터 높이의 용암으로 된 벽으로 둘러 싸여 있고 푸른 빛을 내는
나즈막한 호수와 같은 이곳은 그래서 아주 특수한 분위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피부가 예뻐지는 꿈을 꾸며
얕트막한 물 속에 편히 앉아서 잡념을 거두어 낸다.
다음 행선지는 세계에서 최초의 국회가 있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940년에 시작된 국회라고 한다. 각각의 부족
추장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며 통치하나 아이스랜드 전체를 덴마크나 놀웨이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여러 부족의 추장들이 모여서 힘을 합해야했고 그러기 위해서 최초의 국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곳은 최초의 국회가 있었던 자리일 뿐만아니라 몇 만년 전에 해저에 존재했던 두개의 대륙이 맛 닿아 있던
곳으로 지금은 다시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해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지금 지상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는
지형을 눈 앞에 확실히 보니 얼마나 신기한가. 갈라진 사이는 양 편이 돌 담처럼 보이는 바위들로 이루어져있고 그
사이가 아주 넓은 골짜기 같은것에 놀랐다. 지금도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중심에서부터 지상까지 늘 변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폭포하면 나이아가라폭포, 빅토리아폭포, 블루나일 폭포 등등 큰 폭포를 많이 봐서인지 웬만큼 물의 양이 많지 않으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된다. 그러나 이 Golden 폭포라는 뜻의 굴포스(Gulfoss) 폭포는 물의 양도
많고 두개의 층으로 되어있으며 폭이 넓다. 물이 떨어지는 깊이는 105피트라고 하니 물 떨어지는 힘이 엄청 세어서
우렁차게 들릴 수 밖에 없다. 물 떨어지는 강도만큼 많은 량의 물 안개가 끊임없이 대기를 채우고 거기에 짙은 빛의
무지개가 선명하게 보여 너무도 고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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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로 빼 놓을 수 없는 곳 중의 또 하나.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땅에서 뜨거운 물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이 솟아 오르는 분수 혹은 간헐천(geyser)을 빼 놓을 수 없다. 뜨거운 물이 땅 밑에서 부글부글 끓다가 어느 순간
치솟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 높이가 30피트쯤 될것 같다. 이렇게 세군데를 돌아 보는데 버스로 7시간 걸렸다.
이 배의 선장은 트럼펫을 부는 놀웨이에서는 파트타임 음악선생이다. 크루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밤에는 승무원들의
쇼가 성황리에 끝났고 자정이 넘은 한 밤의 쇼에서는 선장이 2시간동안 수준 높은 재즈를 연주해서 떠나기 아쉬워하는
승객들의 마음을 달랬다.
선장의 이별의 칵테일 파티에는 처음 환영의 파티때와 마찬가지로 승객들은 모두 성장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선장의
이별의 말과 항해 중에 있었던 일, 승무원들의 안녕을 고하는 말의 순서가 있었다. 주방장의 재미있는 농담과 함께
그간 승객이 먹은 감자가 4톤, 아침 식탁에 놓이는 종이에 싼 버터가 거의 3만개, 생선이 3톤이 넘고 채소가 8.4톤,
우유가 4.7톤, 소고기가 2톤이 넘는다라는 말에 우리 모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두 체중을 그 만큼 늘려서
돌아가는게 아닌가 하며 그러나 최고급의 음식을 대접 받은것에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이별이 아닌 안녕을
그들에게 고했다.
이렇게해서 북극에 가까운 사람이 살것 같지 않았던 그린랜드를 보고 화산이 터져 유럽전체의 대기에 화산먼지가
너무 많아 일주일 동안이나 전 유럽의 상공에 비행기가 날지 못했던 화산의 나라 아이스랜드를 돌아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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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 한인동포 자유기고가 손선혜
유로저널 칼럼리스트
ommasdream@hanmail.net




손선혜의 그린랜드, 아이스랜드에 가다)2(

손선혜의 그린랜드, 아이스랜드에 가다)2(

지난번 이 배를 탔을 때에 불란서인인 주방장에게 우리의 대표적인 음식을 소개했다. 불고기, 즉석김치(겉절이),
그리고 시금치나물의 조리법을 알려 주었다. 새로운 메뉴를 내 놓는 결정을 하는데는 수속절차가 엄중하여 시간이
많이 걸렸으나 설득에 성공! 나의 시식으로 잘 만들어졌음을 확인하고 부페에 선을 보였었다. 대 성공이었다.
바로 그 주방장을 이번에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워한다. 이번에는 갈비, 파썰이, 생선전을 가르쳐 주었다.
이번에도 대 성공! 부페에 내 놓으니 아주 인기가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내 끼니도 걸르고 내가 마치 직접
장사하는 양 서브하는 자리에 서서 손님들에게 요리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곳 꽈꼬톡은 남부 그린랜드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배에서는 꽈꼬톡에 대한 역사 지리 그리고 구경할 만한 것을
소개하는 전문가의 강의를 들었다. 제일 큰 도시라지만 항구 가까이에 자그마한 분수가 있는 광장이 있고 그린랜드에서
유일한 털을 다루는 공방이 있다. 이 광장에는 그린랜드에 유일하게 있는 분수가 있는데 이 도시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허나 너무도 볼품이 없고 물이 뿜어 나오지도 않는 작은 분수다.
그린랜드에는 아이스랜드에서 1775년에 앤더스 올슨(Anders Olsen)이라는 사람이 건너와 처음 정착했다고한다.
아이스랜드사람들에게 이곳에 푸른땅이 있다고 하며 이주하도록 설득했다고 해서 이름이 그린랜드라고한다.
 문이 닫혀있는 교회 하나와 조그만 박물관을 보았다. 문이 닫혀있는 교회 옆에는 조그만 창고크기로 교회와 같은
색의 건물이 있다. 호기심에 물어보니 그것은 시체실이라고 한다. 땅이 너무 꽁꽁얼어 매장이 불가능할 때에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라고.



맑은 날씨에 푸른 하늘을 이고 산 모퉁이를 돌고 또 오르고 내리며 바다처럼 보이는 커다란 호수 주위를 한바퀴 도니
그 거리가 자그마치 12킬로미터다. 그린랜드에서 보기드문 좋은 날씨에 산행을 하니 상쾌하게 피곤했다. 산에서
만나는 그린랜드의 젊은이들은 인사를 잘하고 미소를 잃지 않고 묻지도 않은 산길을 가르쳐 주는 등 친절하다.
우리나라 지리산에서 만났던 젊은이들이 생각난다. 하루코스를 생각하고 올라간 자리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다섯 명의
여승들의 설득으로 4일동안 함께 지리산을 종주했다. 젊은이들과 여승들이 갖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산장에서는
담요를 빌려쓰면서 가는 길은 여간 즐거운것이 아니었다. 준비없이 왔다고 또 다른 주위 사람들이 주는 음식은 어찌나
많았던지. 얻은 떡이 세 광주리라는 말이 맞는 말이었다. 한 젊은이는 내 신발 끈이 잘 매어 있지 않다며 ‘어머니,
앉으세요’ 하더니 다시 잘 탄탄히 매주며 ‘잘못하면 발목 다칩니다.’ 했던 기억도 새삼스레 떠오른다. 미지의
여행길에서 처럼 미지의 인생길을 즐거운 동반자들과 함께 하면 덜 힘들고 더 즐거운 것은 모르는 일은 아니나
새삼스레 가슴이 따듯해진다. 이렇게 예정에 없었던 지리산행은 내게 오래 남는 추억이다.



다음에 닻을 내린 곳은 나사수악(Narsarsuaq), 오늘도 날씨가 좋다. 이곳은 선착장에서 시작되는 길, 하나가
전부이고 집 몇채의 주민들이 전부인 듯 보인다. 그 길의 끝에 활주로가 있어 경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산길을 안내
하는것이 전부인듯 하지만 그래도 관광안내소가 있어 빙하에 가는 길 표시가 있는 지도를 판다. 크지도 않은 지도
한장에 10파운드다. 비록 급경사의 산과 바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왕복 16킬로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산 넘어 산,
깊은 산에 있는 빙하까지 갔다. 마지막 정상까지의 300미터 높이의 바위산은 주로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하는 급경사의
길이어서 힘들었다. 배에서 출발한지 9시간 만에 돌아왔다. 힘든 산행이었으나 바로 눈 앞에 수 만년 동안 전 부터
그렇게 있었을 그 장관의 빙하를 보았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다음 행선지는 나노탈릭(Nanortalik). 나노탈릭은
‘폴라베어(복극곰)가 가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하나 지금은 곰이 육지에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한다. 1778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고래기름과 물개가죽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작은 곳이기는 하나 호텔,
박물관, 관광안내소, 우체국, 은행, ATM,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수퍼마? 과 교회가 있다. 마을의 한끝에서 다른
한끝까지 걸어서 5분거리다.
배에서 내리니 온 동네사람들이 자기네 고유의 의상을 입고 나와 박물관안내도 하고 매시간 교회에서 열리는 합창
공연에 우리들을 안내하느라 바빴다. 타운홀에서는 자기네 고유의 춤을 보여주며 과자, 케이크, 커피를 대접하는등
온 마을이 축제 기분이었다. 배의 승객은 850명인데 그곳 주민은 1300명이라니 우리의 방문이 그들에게도 큰
이벤트인 것 같았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그들의 통나무로 만든 배, 카약을 타고 기술을 보여주는 쇼를 보고 정이 많은 나노탈릭사람들과
헤어졌다. 배가 닻을 내렸던 항구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항구다. 그들의 따듯한 환영과 많은 양의 자료를 규모있게
잘 정리해 놓은 박물관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그런가보다
바로 이곳이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북극의 빙하로 덮힌 곳이라고 상상했던 곳이다.
배는 ?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아이스랜드를 향하여 2일간 바다를 항해했다. 수많은 크고 작은 빙산들, 몇 만년씩이나
오래된 빙산이 푸른 빛을 낸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 온통 빙산들 뿐이다.



아이스랜드로 갈 때는 바람이 세어서 강풍의 정도가10 이었고 갑판에도 나갈 수 없었다. 센 바람과 함께 빙산들이
너무 많아서 배가 속력을 내지 못했다. 결국 애초에 기항하려던 이사표르드(Isafjord)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아이스랜드의
수도 레이캬빅(Reykjavik) 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레캬빅에서 3일 밤을 묵게 되었다.
아이스랜드의 수도 레이캬빅에 사는 딸의 친구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음악가인 엘사를 만났다. 그의 안내로 짧은
시간동안 많은 구경도하고 아이스랜드 사람들을 만났다. 아이스랜드의 수도 레이캬빅은 18만의 인구로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름의 ?은 ‘자욱한 만’이라고 한다. 시내의 한 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는 대형 물탱크들과
거대한 크기의 둥근 지붕을 만들어 놓았고 넓은 조망대를 만들어 그 이름을 진주(The Pearl)라 하며 도시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소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온다.
어느 동네를 가나 크고 작은 음악학교가 있는것이 의외의 발견이다. 미술관,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이나라 사람들은
예술에 관심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실내가 따듯하기에 물어보니 도시 전체가 흔하게 많은 뜨거운 지하수로
난방을 하니 물과 전기 값이 안든다고한다. 영국의 물가를 생각해본다.

<다음 주에 계속>



재영 한인동포 자유기고가 손선혜
유로저널 칼럼리스트
ommasdrea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