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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31일 토요일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어깨가 처진 그대여, 고개를 숙인 그대여
그렇게 괴로워해도 그대는 소중한 사람
세상엔 여러 사람들, 저마다 잘난 사람들
날마다 CF속엔 모두가 행복한 사람
하지만 외로워마요, 그대는 우주 안에
누구와도 바꿀 수는 없는 그대만의 세상 있잖아
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최선은 우리의 권리
결과는 하나님의 ,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워만 왔지
남보다 잘났어야만 칭찬을 받았었나봐
공부는 재밌는 건데, 왜인지 힘겨워했고
인생은 즐거운 건데, 왜인지 어렵게 됐지
이제는 눈을 떠봐요, 그대는 우주 안에
누구도 견줄 수는 없는 그대만의 세상 있잖아
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최선은 우리의 권리
결과는 하나님의 ,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 최성원

한국록의 전설 들국화의 원년멤버였던 최성원이 솔로로 발표한 노래 행복의 열쇠 가사다.

이제 올해를 불과 이틀 남겨놓은,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는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 한적하기만한 출근길 기차안에서 오랜만에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해를 마감하면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해였다고 말하곤 한다.

문자 그대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는 것인데,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영원이 없을 것이다.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아주 외진 첩첩산중에 홀로 기거할 지라도 삶이 다사다난할진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일들을 공유하며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에 속해 살면서 어떻게 다사다난
하지 않겠는가?

하루 동안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많은 감정이 교차하여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낼진대,
다사다난한 하루들이 365번이나 반복되는 해가 어떻게 다사다난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면 결코 다사다난이 우리들을 불행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것만은 아닌 같다.

누구보다 다사나난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 말이다.

결국, 다사다난은 그저 흘러가는 것일 , 그것이 진정 우리가 느끼는 불행과는 상관이 없는
같다. 그보다는 결국 우리들의 마음먹기에 모든 것들이 달려 있는 아닐까?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것들이 비록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까지는 괜찮지만, 결코 그것들로 인해 우리에게 불행을 느끼게 해서는 된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불행을 느끼게 하는 가장 요소는 어쩌면 다른 이들과의
비교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좋은 아닌데도, 실제로는 그렇게 부족한 아닌데도, 남들과의 비교는
우리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불행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내가 가진 것도 좋은 것인데도, 실제로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많은데도,
남들과의 비교는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남이 가진 커다란것만 보이게 해서
감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슬프게도 남의 눈에 비쳐지는 것에 너무나 많은 비중을 두는 우리 한국인들의 삶은 더더욱 비교
때문에 불행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최선은 우리의 권리, 결과는 하나님의 ,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을 진리를 담은 단순한 노랫말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살기가
이리도 어려운 것인지?

이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원했던 바를 성취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최선이라는 우리의 권리에 충실했다면, 지금 순간 우리 손에 주어진 결과물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는 충분히 즐겁고 감사할 있어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그럴 듯한 계획들을 세운다. 그리고, 아쉽게도 대부분은 3
정도쯤 되면 거의 실천 중단혹은 실천 포기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저 그래왔던 그대로
살아가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는 다른 계획들도 좋지만 매일 적어도 가지씩 만이라도 감사할 것을
찾아보는 계획은 어떨까?

아무리 재수 없는 날에도, 아무리 스트레스 받는 날에도, 아무리 슬픈 날에도, 그래도 찾아보면 적어도
가지 감사할 것은 있지 않을까? 없다면 그래도 오늘 하루 살아있음에라도 감사하면 일이다.

새해에는 수도 없이 되뇌어 보리라,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 지난 동안 서른 즈음에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다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계속해서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리며, 새해 많이 받으세요!



2011년 12월 20일 화요일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나 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직접 내 돈을 주고 산 첫 크리스마스 트리이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이후 너무나 오랜만에 장식해본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후로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하지
않았고, 당연히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입한 적도, 장식한 적도 없었다.

영국에 와서도 월셋방에 살면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여놓는다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주 테스코에 장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크리스마스 트리를 하나 발견했는데, 높이도 한 50cm
정도에 자체 발광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서 전구도 별도로 구입하지 않아도 되는 미니 트리였다. 무엇보다
가격을 할인 중이어서 10파운드도 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급기야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고야 말았다.

워낙 아담한 미니 트리라서 그냥 서랍장 위에 설치했고, 장식도 많이 할 필요가 없을 듯 해서 은방울과
은색 구슬띠만으로 간단하게 장식을 했는데, 완성해놓고 보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예쁜 트리였다.

트리 밑에다가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하이드파크에서 열리는 윈터 원더랜드의 크리스마켓에서
매년 한 두 개씩 사서 모으고 있는 작은 크리스마스 조각품들을 진열해놓았다.

0.JPG

너무나 오랜만에 가져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다섯 살 무렵부터 살았던 마포구 중동의 성산아파트 시절, 마루라고 해도 지금 내가 사는 방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던 그 작은 마루 중앙에 냉장고가 있었고,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 냉장고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반짝이던 그 크리스마스 트리가 어린 시절에는 어찌나 신기하고 신나던지, 부모님께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잠들고 나면 그 트리 밑에 평소 내가 갖고 싶어했던 장난감을 포장해서 놔두시곤 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시에는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가 그 밤에 다녀가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고, 크리스마스 이브 한밤 중에 깨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여진 선물을 가져오곤 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비몽사몽한 와중에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도 예쁜 빛을 발하던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그
밑에 놓여진 선물, 선물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 그 황홀하고 신비롭던 동심 속의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흔히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동심을 잃어간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리도 굳건히 산타를
믿었건만, 내가 바라는 선물의 가격이 만원을 넘어가면서부터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안의 선물들은 모두 부모님이 사서 놔두신 것이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어떻게 산타가 그렇게 내가 딱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을 정확하게 가져다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소
되었지만, 산타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비록 나는 그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돈을 만지고 있고, 어린
시절에는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건만, 그 대신 그 어린 시절 행복했던 동심은 이제 내가
가진 돈을 다 주고서도 살 수가 없다.

오늘 밤 꿈 속에서나마 좁디 좁은 성산아파트에서 살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놓여진 선물을 발견하고 싶다.

아마 그 곳에는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을 우리 부모님의 젊은 시절 모습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가 선물을 놔두셨을 부모님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겠지...


2011년 12월 14일 수요일

친구 (3)

다섯 살 적에 만난 친구 성훈이에 대한 이야기 친구’, 그리고 마포구 중동에 살면서 중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만난 중학교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친구(2)’에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
.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서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명지고등학교를 다닌 탓에,
아쉽게도 고등학교 친구라고는 단 두 명
,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그 두 명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와 창원이와 경철이는 같은 반이었다. 경철이와는 앞 뒤 자리에 앉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점심을 같이 먹는 무리에 속하게 되었고
,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다.
경철이는 어딘가 어른스러움이 있었고, 공부도 잘 하고, 당시 또래에 비해서는 참 이성적인 녀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철이는 남자 3형제 중 맏형이었다.
창원이와는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당시만 해도 어지간한 영화광이 아니고서는 고등학생으로서는
빠져들기 힘든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본 경험을 공유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홍콩, 그리고 중국의 매력에 심취해있던 창원이는 경철이와는 반대로 위로 누나만 둘 있었고, 참 감성적인
녀석이었다
.
우리 셋은 공통적으로 셋 다 참 차분한 녀석들이었고, 별로 튀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 그럼에도 우린 그렇게 친해져 갔다.
경철이는 연신내에 살았고, 창원이는 무악재에 살았는데, 3 수능을 마치고 무악재 창원이네 집에
놀러가서 호프집을 갔다가 신분증을 까라고 해서 결국 소위 뺀치를 먹고서 노래방에 가서 차분한 남자
셋이서 청승맞게 발라드만 냅다 불러댔던 기억이 난다
.
우리가 본격적으로 어울려 논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또 창원이가 마침 일산 우리집과 도보로 10분 거리로
이사를 오면서부터였다
.
금요일 저녁이면 경철이가 일산으로 놀러와서 셋이서 새벽까지 어울렸다.
당시 우리들이 밟는 코스(?)가 있었다.
1차는 늘 당시 내가 통기타 라이브 알바를 하던 생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꼭
포켓볼을 치러 갔다
. 우린 4구는 절대 안 친다. 그리고 나서 Feel을 받는 날에는 새벽까지 여는 투다리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 그리고 나서 편의점에서 사발면을 사다가 벤치에 앉아서 먹고는 담배를 피워물고
벤치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면서 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경철이는 우리집이나 창원이네 집에서
잤고
, 다음날 일어나면 셋이서 목욕탕을 갔다.
경철이는 무역과, 창원이는 철학과, 나는 영문과, 전공도 다 다르고, 꿈과 성향도 다 달랐던 우리들이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나누었는지
, 늘 그렇게 새벽까지 그치지 않는 얘기들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그 시절, 이성에 대한 동경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저마다의
고민과 꿈을 되뇌이던 그 시절
...
대학 2학년 때 셋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여자친구가 생겼으니, 대학 1학년 때는 정말 셋이서 그야말로
걸핏하면 만나서 놀았던 것 같다
. 심지어 우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셋이 만났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공유했던 그 시절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리가 서른 넘어서
이렇게 만나기가 어려워질 줄은
.
대학 1, 2학년 시절에는 세상과 사회에 대한 답답함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우리가 젊었기에
그저 그 모든 갈등과 고민들을 이야기하는 것 조차 즐거울 수 있었다
.
하지만, 우린 마냥 거기에 머무를 수는 없었고, 인생의 다음 계단을 밟고 올라서야만 했다. 
셋 중에서 창원이가 가장 먼저 취업이 되었다. 영화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언론의 길도 꿈꾸었던 감성적인
철학도 창원이는 녀석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반 회사에 입사했다
.
추운 겨울 날 창원이의 취업을 축하하기 위해 연신내에 모인 우리, 방바닥이 따뜻한 어느 횟집에서 정작 주
인공인 창원이는 취업 준비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드러누워 잠이 들었고
, 경철이와 나만 냅다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창원이 녀석이 일 년 가량 회사를 다니다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그 좋아하는 중국에 인생
일대의 모험을 하러 떠나버렸다
.
우리 셋이 마지막으로 같이 모인 자리는 창원이가 중국으로 떠난다고 해서 만났던 2005년의 어느 봄날이었고,
이후 우리는 단 한 번도 셋이 만나지 못했다
.  
창원이는 그렇게 홍콩영화를 좋아하고 중국을 좋아하더니 결국 아리따운 중국 아가씨와 결혼을 해서
중국에 정착해 버렸다
.
그나마 경철이가 한국을 지키고(?) 있지만, 이렇게 창원이와 내가 외국에 정착한 탓에 셋이서 정확하게 일정을
맞춰서 얼굴을 보는 게 너무 어려워졌다
.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당선되셨던 16대 대통령 선거 날, 셋이 만난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다음 대통령
선거에는 우리 모두 서른이 되어 있겠구나 했었는데
, 세월은 기약없이 흘러갔고 어느덧 우리는 서른을
훌쩍 넘긴 아저씨들이 되어 버렸다
.
내년에는 우리 셋이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늙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