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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7일 수요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노라니...

얼마 전 회사 앞에서 멀쩡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멀쩡하게 생긴 서양인(영국인 혹은 유럽인)
샌드위치맨처럼 커다란 양면 간판을 몸 앞과 뒤에 늘어뜨리고 걷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Job Wanted, 즉 일자리 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최근 직장을 잃은, 제법 유능했던 사람 같은데...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 금융가에서
누군가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동시에 누군가는 일자리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니...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와 불경기의 여파가 끝났나 싶더니, 최근 유럽의 재정위기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지난번 보다 더 심각한 불경기가 찾아오려는 것 같다.

경기가 나빠지면 당장 내가 일하는 채용/헤드헌팅 업계에서 그 파급효과가 민감하게 감지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증가하는데, 일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감소한다.
직업을 찾아달라는 후보자들은 많은데, 이들에게 소개해 줄 일자리가 너무 없으니, 헤드헌터인
나 역시 같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신규 채용은커녕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회사들도 너무 많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들이 부러운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대기업들도
순식간에 휘청거리고, 수 년 동안 일한 직원들을 가차없이 내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 기분, 아직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이미 간접적으로 겪은 것
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것일지 충분히 공감이 된다.

부양할 식구들이 있고, 매달 무조건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금액이 상당하다면, 게다가 나이까지
어느 정도 있어서 재취업도 어려운 이들이라면, 정말 일자리를 잃었을 때 눈 앞이 캄캄할 것 같다.

방값과 차비 말고는 신용카드도, 장기계약 휴대폰도 없어서 정기적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없는,
그래도 아직은 젊다면 젊은 나 조차도 당장 실업자가 된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빚 안 지고, 그래도 밥 안 굶고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기적인 것 같다.

그런데, 가끔 좋은 음식점이나 쇼핑가를 방문해보면 여전히 손님이 미어 터진다. 잘 되는 음식점은
이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가격을 올렸고, 여전히 줄을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고급 쇼핑점 역시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럴 때면 혼돈이 온다, 정말 불경기가 맞는 것인지. 다들 무슨 일들을 하길래, 다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길래 저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걸까? 마치 나만 가난하고, 나만 아둥바둥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나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도 많고, 정말 하루 하루 생존이 전쟁 같은 사람들도 많은데, 또 한
편에서는 그야말로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요즘, 정말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가끔은 나도 든든한 배경을 지녀서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는 이들, 아니면 적어도 일자리만이라도 보장되는 한국의 공무원이 부러울
때가 있다. (영국이나 유럽은 공무원도 해고 당한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대통령 아들이 10억을 주고 땅을 매입하려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화가 났다가
결국은 허탈해진다. 화가 나는 이유는 어떻게 나랑 나이가 비슷한 그 친구가 10억이나 되는 돈에
연루(?)될 수 있느냐 싶어서, 그리고 허탈해지는 이유는 어차피 그래봐야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까.

주어진 환경을 탓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정말 못난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정말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나 정도면 그래도 너무나 감사한 배경을 지녔고,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과분한 삶을 누리고
있다. 정말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너무나 억울했을 것 같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심할 만큼 어렵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오버하는 것 같지만 정말 솔직히 나는 과연 인류가 앞으로 과거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비록 현대 인류는 거대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최첨단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먹고 살기는 과거보다
훨씬 치열해졌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더욱 피폐해졌다.

그저 땀 흘린 만큼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적당한 규모의 집을
장만하고 적당한 나이에 은퇴해서 남은 여생을 즐기는 게 상식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지난 오랜 세월동안 ‘선진’, ‘복지’, ‘삶의 질’ 이런 단어들로 대표되었던 유럽이 그야말로 휘청거린다.
어떻게든 구급처방을 써보지만, 결국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유럽이 넘어지면 유럽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가 그 통증을 견뎌야 할
것이다. 부디 우리에게 그 통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길 바래본다.

한국전 참전용사의 한 마디, “Remember us!”

토요일이었던 어제, 레딩(Reading) 한인회(회장 조영준)에서 주관하는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내가 활동하는 가야금&기타 듀오 KAYA가 연주를 하러 다녀왔다.

레딩 한인회에서는 매년 한국전 참전용사회 (British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레딩 지부
소속 회원들에 대한 위로 모임을 갖고 있다.

지난 2008년도에 당시 레딩 한인회장이셨던 조신구 회장님의 초청으로 연주를 다녀온 뒤에, 올해까지
무려 네 번이나 같은 행사에서 연주를 한 셈이다.

어차피 매년 똑 같은 한국전 참전용사회 레딩 지부 소속 회원들이 손님으로 오시는 행사인 만큼, 결국
같은 관객들에게 무려 네 번이나 연주를 들려드린 셈인데, 그분들께서 KAYA의 연주가 조금 식상하지
않으실까 싶기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계속해서 KAYA의 연주를 좋아해주셔서 매년 KAYA를 초청한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한국전 참전용사분들을 위해 연주를 참 많이도 했다.
레딩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대거 참석하시는 킹스톤 한인축제에서도, 레인즈파크 한인
교회가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행사에서도, Hereford 관청(Council)이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행사에서도.

그러다 보니 KAYA의 연주를 여러 번 접했다며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참전용사분들도 종종 만나게 되고,
또 이제 몇몇 참전용사분들의 얼굴이 익기도 하다.

이분들은 어리게는 19세부터 대부분 20대 청춘에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떠나와 6.25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이다.

당연히 지금은 백발 노인들이 되셨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도 계시고, 무엇보다 마음이 아픈 것은
해마다 참전용사 행사를 가보면 그 전 해에 비해서 한 두 명씩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낙 연로하신 분들이라 매년 하늘나라로 떠나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시점이 되면 이
분들이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은, 그래서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도 오게 될
것이다.

참전용사분들을 위한 연주를 워낙 여러 번 해서 사실 어느 시점부턴가는 참전용사분들을 뵈어도 다소
덤덤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는 왠지 행사 내내, 특히 참전용사분들의 당시 증언과 소감을 들으면서,
그 분들을 바라보면서 까닭 모를 뭉클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 젊은 나이에 전혀 알지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담보로 한 채 고향을 떠났을 그들의
심정, 그리고 그 낯선 한국 땅에서 겪은 전쟁의 시간들...

6.25가 끝난 지 벌써 수 십 년이 흘렀건만 지금까지도 참전용사회를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그분들, 아직도
남아있는 전우애, 그리고 해마다 한 두 명씩 전우들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는 안타까움...

백발의 할아버지들은 역시 백발의 할머니가 된 아내들을 데리고, 때로는 손주들을 데리고 행사장을 찾는
분들도 계시고, 때로는 혼자서 쓸쓸히 행사장을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신다.

전기휠체어를 타신 분도 계시고, 보청기를 끼신 분들도 계시고, 그러나 그 백발의 할아버지들 속에서
청춘의 늠름한 모습으로 한국을 찾았을 그 분들의 젊은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분들, 우리는 정말 그 분들께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음악을 연주해드림으로써 나마 그 분들께 작은 보답이라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참전용사분이 인사말을 하시면서 “Remember us(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하셨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 우리는 이 분들을 기억해드려야 한다.

언제 또 다시 참전용사분들을 위해 연주를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해 뵈었던 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다음 연주에서도 뵙고 싶다.




2011년 11월 16일 수요일

상실

0.jpg
슬픈 노랠 들어도 슬프지 않아 
 아무 느낌도 없는 걸  
내 마음이 언제쯤 아팠었는지  
이젠 기억 조차 할 수가 없어  
조금씩 그렇게 무디어져 갔네

사랑마저 없으면 못 살 것 같이  
외로움에 떨던 시절에  
사랑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그저 행복하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 또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뒤돌아 볼 여유가 하나도 없이  
오늘도 하루가 가네  
변해버린 자신도 못 느끼고 
 그저 앞으로만 걸어가겠지  
한 번쯤 뒤돌아 볼만도 한데
                                  이정선

대한민국에서 통기타를 독학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정선 기타교실
저자이자 한국 대중가요계의 대부 이정선의
상실이라는 노래 가사다.
원래부터 참 좋아하는 노래였지만, 특히 요즘에는 새삼 그 가사 내용이 너무나 공감이
가면서 가슴을 파고든다
.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을 알아갈수록,
하루 하루 살아갈수록 감성이 무디어져 간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
슬픈 노래를 들어도 슬프지 않은 채, 변해버린 자신도 못 느낀 채 그렇게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으로만 걸어가다니
...
슬픈 노래가 슬픈 게 아니라, 그렇게 슬픈 노래를 들어도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되어버린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이 더욱 슬픈 것 같다
.
그냥 하루 하루 밥벌이에 충실하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이만 올라간다고 그게
산다는 것의 전부는 아닐 텐데
, 그것들 말고도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느껴봐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던 그 수많은 느낌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리고
, 이렇게 그저 하루 하루 밥 먹고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로보트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걸까
?
그래도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서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도 짧고, 또 이렇게 글도 쓰고
음악도 하면서 삶의 느낌들을 나름대로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건만
, 그럼에도 나
역시 아주 조금씩은 그렇게 무디어져 가는 것을 느낀다
.
아주 어렸을 적에 좋아했던, 어른이 된 지금은 어쩌면 유치할 수도 있는 그 오래된
영화들을 여전히 보고 또 보면서
, 예전에 봤을 때는 분명 눈물을 흘렸던 장면인데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불안
(?)하기까지 하다.
음악을 할 때도, 어떤 날은 관객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멘트를 하는데, 하는 나 자신이
별 느낌이 없을 때가 있다
.
음악에만 푹 빠져서 연주하는 동안 어느 꿈나라를 다녀온 것 같은 그 느낌을 분명
알고 있는데
, 그 느낌이 더 이상 살아나지 않고, 심지어 그 느낌을 더 이상 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싶어서
, 그럴 때면 너무나 불안하고 또 속상하다.
특히,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일이 너무 많을 때는 정말 껍데기만 가지고 넋이
나간 채 연주를 할 때도 있다
. 가끔 오전에는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반차를 내고
오후에 연주를 하러 갈 때가 있는데
, 그럴 때면 유독 그런 현상이 심하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연주가 잡힐 때는 아예 하루 휴가를 내고 나름대로 연주할 수 있는 감성을
준비
(?)하기도 한다.
그나마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면서, 또 음악을 하면서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참
다행인데
, 아쉽게도 요즘 세상은 우리에게 뒤돌아볼 여유를,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
그 여유는 단지 시간의 여유라기 보다는, 마음의 여유, 영혼의 여유일 것이다. 그 여유를
통해 우리는 슬픈 노래를 들으며 슬퍼할 수 있는
,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가슴이 설레일 수
있는 자유를 맛본다
.
하지만, 요즘 세상은 그런 여유가 마치 사치인 것처럼 여기게 한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밥
먹고 돈 버는 일 외에 그 어떤 다른 가치를 추구하려 하면
, 그것은 철 없는 혹은 미련한 것이
되고
, 조금이라도 남보다 빠르고 잘나야 하는 경쟁사회에서는 비웃음을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마음 깊은 그 곳에서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진짜 행복을
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 그리고 살아가면서 그것들을 조금씩 잃어간다는 사실도.
여러분들은 마지막으로 슬픈 노래를 들으며 슬퍼한 적이 언제인지, 사랑 하나 만으로
만족하며 행복하던 때가 언제인지
...
혹시 그게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 오래 전처럼 느껴진다면, 슬프게도 당신은 분명
그 무언가를 상실해버린 것일 게다
.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다만 우리 마음 깊은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뿐,
그래서 당신이 그것을 깨우기만 하면 다시 가져볼 수 있는 것이기에
...


2011년 11월 9일 수요일

옥스포드를 ‘또’ 다녀와서

한창 언론 공부를 하던 유학생 시절, 유로저널에 서른 즈음에를 쓰기 시작한 지 불과 두 달 가량이 지난 2007
2월에 옥스포드를 다녀와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옥스포드 대학 한인 학생회에서 매년
2월 한국의 구정을 기념하여 외국인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개최하는데, 당시
내가 활동하는 가야금
& 기타 듀엣 KAYA가 연주 초청을 받아서 난생 처음으로 옥스포드를 다녀온 뒤에 느꼈던 것
들을 쓴 글이었다
.
영국 내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옥스포드에서 열심히 학업 중인 우리 한국인 학생들을 보면서
느꼈던 뿌듯함
, 그들이 훗날 우리나라에 우수한 성과를 가져다 줄 것에 대한 기대 등을 글에 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옥스포드 대학과의 인연은 그 다음해인 2008, 2009년에도 이어졌다. 연이어서 같은 행사에
초청되어 연주를 했던 것이다
.
몇 년씩 같은 행사에서 연주를 하다 보니 옥스포드 한인 학생회 임원들의 세대교체
(?)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령,
전년도에는 단순히 임원이었던 친구가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고
, 또 나는 그들을 인터뷰해서 유로저널에 실어주기도
했다
.
재미있는 일은 2009년도 당시 인터뷰를 했던 옥스포드 한인 학생회장 조한빛 군이 한국의 유명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사실
.
얼마 전에 인터뷰를 작성했던 노세현 상담가 역시 그 당시 행사에서 사회를 봤었고
, 그 때의 인연이 남아서 이번에
인터뷰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
2009년도 행사 이후 2010년도에는 옥스포드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고, 한 동안 옥스포드 한인 학생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
그러다가 얼마 전 또 다시 옥스포드 한인 학생회에서 연주 요청이 왔고
, 지난 번 옥스포드에서의 연주가 2009
2월이었으니, 거의 3년 만에 옥스포드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오랜만에 방문한 탓인지, 이제는 아는 얼굴도 전혀 없고, 무엇보다 지금 옥스포드 학부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
, 심지어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학생들도 너무 앳되어 보였다.
그랬다
, 어느덧 대학생들이 내 눈에 어려 보일 만큼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눈에 나는 늙어 보일 만큼)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
처음 옥스포드를 방문했던 2007년도의 경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당시 학생회장 최재호 군만 해도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 같이 어울려 맥주도 한 잔 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동생뻘이었는데, 이제는 갓 20
초반인 옥스포드 학부생들과 내 나이차가 열 살이 넘어버린 것이다
.
2007년도 행사 때는 나 역시 비록 석사 과정이지만, 어쨌든 학생 신분이었지만, 이제 나는 직장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도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
2007년도 행사 때는 연주를 마치고 이어진 제기차기 대회에서 나도 참여해서 같이 제기도 차고 그들과 어울려
놀 수
(?) 있었는데, 이번 행사에서 나는 인사말을 하면서 내가 런던 시티에서 헤드헌터로 일하고 있으니, 아마
여러분들이 졸업하면 나를
(구직자와 헤드헌터 간 만남으로)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KAYA의 단골 레퍼토리인 비틀즈의 ‘Let it be’를 연주하면서, 비록 그들은 큰 박수를 보내주었지만, 문득 이제
20대 초반인 그들 중 어쩌면 ‘Let it be’를 모르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어쩌면 ‘Let it
be’는 이제 20대 초반 대학생들에게 들려주기에는 그야말로 너무 올드한 음악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
연주를 하면서 문득 문득 바라본 그들은 이제 나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젊음과 그들의 꿈을 마음껏 그려볼 수
있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미래를 갖고 있었다
.
나도 그랬던 시절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버린 것일까...
아마 지금 내 글을 읽고 계실 나보다 더 연배가 높은 인생 선배들을 또 이런 나를 보면서 그나마 나의 젊음
(?)
부러우시겠지
...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컴퓨터에 저장된 옥스포드에서 찍은 지난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았다
.
2007 2월에 찍은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당시 제법 머리를 많이 길러 뒷머리가 치렁치렁하며, 지금보다 훨씬
날씬하고
, 또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어떻게 보면 당시만 해도 유학을 마친 이후의 인생에 대해 참 고민했던 시절이었고,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나
두려웠던 시절이었으며
, 기타 레슨과 글쓰기로 버는 돈으로 절약해가며 겨우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4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이제 나는 런던에서 직장을 다니며, 2007년에 비해서 훨씬 많은 돈을 벌고
그 만큼의 여유도 누리고 있다
.
하지만
, 세상살이는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어려워진 느낌이다. 가슴이 아픈 일도 그 때보다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래서
, 그 모든 아픔들과 고단한 세상살이를 잊기 위해 오늘도 난 내가 퉁기는 기타의 울림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요즘 우리 나라를 봐도, 또 세계를 봐도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너무 극심하다 보니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 못하다.
그야말로 ‘가진 자들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진 자들은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이 누리는 것의 손톱만큼도 누리기가 어려운 불공평한 세상이다.
비록 지금은 화제가 되었던 초반에 비해서는 흐지부지 되어버린 형국이지만,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가진
자들을 향한 시위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번졌고, 지구촌의 민초들은 이 시대에 만연한 ‘불공평’에 분노하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를 가진 자로 봐야 하고 어느 수준까지를 가지지 못한 자로 봐야 하는지는 아무로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심지어 증가시켜서, 또 그것들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되물림
하려 한다. 분명 하늘의 축복은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이미 가진 것들을 기반으로 더 많은 것들을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게 되어있다.
반면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나마 가진 것들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고, 또 그렇게 가지지 못한 인생을 자손들
에게 되물림하게 된다. 분명 하늘의 저주는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갖기가 너무나 어렵고, 심지어
그나마 가진 것들도 잃게 되어있다.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법칙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로 바뀔 수 있는 길은 그야말로 로또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식으로, 정말 아무런 배경 없이도 스스로의 노력 만으로 인생의 역전을 일궈
내는 성공신화가 제법 있었지만, 현 시대는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올 수 없도록 구조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이제 용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부모의 재력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단계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되물림되고, 또 대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이 되물림되면서, 가지지 못한 자로 인생을
사는 게 너무나 고달프기에 우리는 가진 자들을 향해 분노를 내뿜는다.

그런데, 이렇게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두 가지 경우일 수 있다.
하나는 이렇게 비정상적인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유지시키는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이다. 이들은 이렇게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와 지나치게 가지지
못한 자가 지금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아마도 가진 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이렇게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결국 이들을 통해 변화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다른 하나의 시선은?
자신은 많이 갖지 못했기에 그 가진 자들이 너무나 밉고 못마땅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는 시선이다.
즉, 빈부격차가 부당하다고 믿으면서도, 언젠가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즉 가진 자들이 미우면서도 부러운 시선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서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썩은 정치인을
비판하면서도, 그 썩은 정치인이 누리는 부와 지위는 은근히 부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솔직한 속마음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비록 지금은 가지지
못한 자에 속하지만, 언젠가는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이러한 시선과 바램을 지닌 채, 그러나 겉으로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부당함과 불공평을 바꾸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본인은 이익을
취하고 풍요를 누리는 입장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인지 알고 싶다면 답은 간단하다.
지금 나의 현재 상황에서 분명히 어딘가 존재하는 나보다 못한 이들, 나보다 낮은 이들을 위해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양보할 의사가 있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명색이 언론 공부를 했고, 기자라는 명함을 5년 째 갖고 있는 필자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정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진 자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들 가운데, 앞서 언급한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이 정치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면 좋겠다는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드문데, 하물며 얼마든지 가진 자의 입장이 될 수
있는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 중에서는 얼마나 드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드문 사람을 분간하고, 알아보고, 지지하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