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7일 수요일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 요4:19-30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 요4:19-30

하나님 이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배, 선교, 교육, 봉사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이 중에 예배에 대해서
다른 것보다 우선시 하도록 강조하며 온전한 예배자가 되도록 강조한다.

첫째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왜 중요한가?

1. 예배를 통해서 잃어버린 복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토지, 교제의 복을 상실하였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땀흘려도 수고한 만큼 얻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잃고
인간 관계마저 깨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잃어버린 복을 회복할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레위기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예배임을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만나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출29:42-43, 출25:22) 이것이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는
자가 죄를 이기는 힘을 얻고 예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보호와 치료, 부족함이 없게
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유다.
2.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행할 가장 합당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어떻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 은 이사야와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이것이 빠지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다. 드리는 예배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1.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2.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
    진정에 담긴 핵심적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예배는 흠없는 것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마음, 뜻,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하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예배여야 한다. 구별된 삶을 살려고
    힘쓰고, 행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하며 드는 예배이다
3.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찬양을 선택하고 부를 때,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전할 때 성령의 감동과 인도가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에 이르게 하신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새 사람이 되어 사람들에게 나가 예수님을
    전하였듯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결론

하나님 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예배, 말씀을 좇아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자에게 잃어버린 생명, 토지, 교제의 복을 회복시켜 주신다. 이것이 예배에 성공하면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산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서 성령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배에 성공하여 삶에도 승리하자.
예배에 성공하여 세상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자.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노라니...

얼마 전 회사 앞에서 멀쩡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멀쩡하게 생긴 서양인(영국인 혹은 유럽인)
샌드위치맨처럼 커다란 양면 간판을 몸 앞과 뒤에 늘어뜨리고 걷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Job Wanted, 즉 일자리 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최근 직장을 잃은, 제법 유능했던 사람 같은데...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 금융가에서
누군가는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벌고 있는 동시에 누군가는 일자리를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니...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와 불경기의 여파가 끝났나 싶더니, 최근 유럽의 재정위기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지난번 보다 더 심각한 불경기가 찾아오려는 것 같다.

경기가 나빠지면 당장 내가 일하는 채용/헤드헌팅 업계에서 그 파급효과가 민감하게 감지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증가하는데, 일자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감소한다.
직업을 찾아달라는 후보자들은 많은데, 이들에게 소개해 줄 일자리가 너무 없으니, 헤드헌터인
나 역시 같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신규 채용은커녕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회사들도 너무 많다.

한 때는 잘 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이들이 부러운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대기업들도
순식간에 휘청거리고, 수 년 동안 일한 직원들을 가차없이 내치고 있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 기분, 아직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이미 간접적으로 겪은 것
만으로도 그것이 어떤 것일지 충분히 공감이 된다.

부양할 식구들이 있고, 매달 무조건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금액이 상당하다면, 게다가 나이까지
어느 정도 있어서 재취업도 어려운 이들이라면, 정말 일자리를 잃었을 때 눈 앞이 캄캄할 것 같다.

방값과 차비 말고는 신용카드도, 장기계약 휴대폰도 없어서 정기적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없는,
그래도 아직은 젊다면 젊은 나 조차도 당장 실업자가 된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빚 안 지고, 그래도 밥 안 굶고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기적인 것 같다.

그런데, 가끔 좋은 음식점이나 쇼핑가를 방문해보면 여전히 손님이 미어 터진다. 잘 되는 음식점은
이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가격을 올렸고, 여전히 줄을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고급 쇼핑점 역시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럴 때면 혼돈이 온다, 정말 불경기가 맞는 것인지. 다들 무슨 일들을 하길래, 다들 얼마나 잘난
사람들이길래 저렇게 여유가 있어 보이는 걸까? 마치 나만 가난하고, 나만 아둥바둥 사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나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도 많고, 정말 하루 하루 생존이 전쟁 같은 사람들도 많은데, 또 한
편에서는 그야말로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너무 많다.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요즘, 정말 속물 같은 생각이지만 가끔은 나도 든든한 배경을 지녀서
먹고 살 걱정이 전혀 없는 이들, 아니면 적어도 일자리만이라도 보장되는 한국의 공무원이 부러울
때가 있다. (영국이나 유럽은 공무원도 해고 당한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대통령 아들이 10억을 주고 땅을 매입하려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화가 났다가
결국은 허탈해진다. 화가 나는 이유는 어떻게 나랑 나이가 비슷한 그 친구가 10억이나 되는 돈에
연루(?)될 수 있느냐 싶어서, 그리고 허탈해지는 이유는 어차피 그래봐야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테니까.

주어진 환경을 탓하고,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정말 못난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은 정말 더럽게 불공평하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나마 나 정도면 그래도 너무나 감사한 배경을 지녔고,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과분한 삶을 누리고
있다. 정말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너무나 억울했을 것 같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심할 만큼 어렵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오버하는 것 같지만 정말 솔직히 나는 과연 인류가 앞으로 과거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비록 현대 인류는 거대한 빌딩숲에 둘러쌓여 최첨단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먹고 살기는 과거보다
훨씬 치열해졌고,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더욱 피폐해졌다.

그저 땀 흘린 만큼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적당한 규모의 집을
장만하고 적당한 나이에 은퇴해서 남은 여생을 즐기는 게 상식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지난 오랜 세월동안 ‘선진’, ‘복지’, ‘삶의 질’ 이런 단어들로 대표되었던 유럽이 그야말로 휘청거린다.
어떻게든 구급처방을 써보지만, 결국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유럽이 넘어지면 유럽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가 그 통증을 견뎌야 할
것이다. 부디 우리에게 그 통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길 바래본다.

한국전 참전용사의 한 마디, “Remember us!”

토요일이었던 어제, 레딩(Reading) 한인회(회장 조영준)에서 주관하는 한국전 참전용사 초청행사에
내가 활동하는 가야금&기타 듀오 KAYA가 연주를 하러 다녀왔다.

레딩 한인회에서는 매년 한국전 참전용사회 (British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레딩 지부
소속 회원들에 대한 위로 모임을 갖고 있다.

지난 2008년도에 당시 레딩 한인회장이셨던 조신구 회장님의 초청으로 연주를 다녀온 뒤에, 올해까지
무려 네 번이나 같은 행사에서 연주를 한 셈이다.

어차피 매년 똑 같은 한국전 참전용사회 레딩 지부 소속 회원들이 손님으로 오시는 행사인 만큼, 결국
같은 관객들에게 무려 네 번이나 연주를 들려드린 셈인데, 그분들께서 KAYA의 연주가 조금 식상하지
않으실까 싶기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계속해서 KAYA의 연주를 좋아해주셔서 매년 KAYA를 초청한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한국전 참전용사분들을 위해 연주를 참 많이도 했다.
레딩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대거 참석하시는 킹스톤 한인축제에서도, 레인즈파크 한인
교회가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행사에서도, Hereford 관청(Council)이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 행사에서도.

그러다 보니 KAYA의 연주를 여러 번 접했다며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참전용사분들도 종종 만나게 되고,
또 이제 몇몇 참전용사분들의 얼굴이 익기도 하다.

이분들은 어리게는 19세부터 대부분 20대 청춘에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떠나와 6.25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이다.

당연히 지금은 백발 노인들이 되셨고,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도 계시고, 무엇보다 마음이 아픈 것은
해마다 참전용사 행사를 가보면 그 전 해에 비해서 한 두 명씩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낙 연로하신 분들이라 매년 하늘나라로 떠나시는 분들이 계신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시점이 되면 이
분들이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은, 그래서 한국전 참전용사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도 오게 될
것이다.

참전용사분들을 위한 연주를 워낙 여러 번 해서 사실 어느 시점부턴가는 참전용사분들을 뵈어도 다소
덤덤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는 왠지 행사 내내, 특히 참전용사분들의 당시 증언과 소감을 들으면서,
그 분들을 바라보면서 까닭 모를 뭉클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 젊은 나이에 전혀 알지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담보로 한 채 고향을 떠났을 그들의
심정, 그리고 그 낯선 한국 땅에서 겪은 전쟁의 시간들...

6.25가 끝난 지 벌써 수 십 년이 흘렀건만 지금까지도 참전용사회를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그분들, 아직도
남아있는 전우애, 그리고 해마다 한 두 명씩 전우들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내는 안타까움...

백발의 할아버지들은 역시 백발의 할머니가 된 아내들을 데리고, 때로는 손주들을 데리고 행사장을 찾는
분들도 계시고, 때로는 혼자서 쓸쓸히 행사장을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신다.

전기휠체어를 타신 분도 계시고, 보청기를 끼신 분들도 계시고, 그러나 그 백발의 할아버지들 속에서
청춘의 늠름한 모습으로 한국을 찾았을 그 분들의 젊은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기억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분들, 우리는 정말 그 분들께 큰 빚을 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음악을 연주해드림으로써 나마 그 분들께 작은 보답이라도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참전용사분이 인사말을 하시면서 “Remember us(우리를 기억해달라)!”고 하셨던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그렇다, 우리는 이 분들을 기억해드려야 한다.

언제 또 다시 참전용사분들을 위해 연주를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해 뵈었던 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다음 연주에서도 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