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삶을 관리하라 삿14:1-4

삶을 관리하라 삿14:1-4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사람의 행하는 모든 일이 완성된다는 믿음과 아울러 하나님은 믿고
행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신다는 믿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에도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관리해야 한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12대 사사로 부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관리하지 못해 믿음을 잃어버렸다. 삼손을 통해 믿고 행하기 위해 어떻게 삶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만남을 관리해야 한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로서 기대가 되는 출발은 하였지만

한 여자를 잘못 만나서 기대 밖의 인생으로 전락하였다. 삼손의 실패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만남을 관리하는데 있어야
할 교훈을 준다. 삼손은 3가지 면 때문에 만남을 관리하지 못했다. 1(보는 것의 실패, 2(자신만을 위한 선택, 3(가지
않아야 할 곳을 찾아감. 그러므로 축복된 만남을 위해서는 반대로만 하면 된다. 1(잘 보아야 한다. 2(하나님의 영광에
유익이 되는 만남을 가져야 한다.)창1:26( 3(가지 않아야 할 곳을 피해야 만남이 관리된다. 승리의 비밀은 넘어질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창39:7-9(

둘째 약점을 관리하라.


사람은 약점이 인생을 실패케 만들고 장점이 인생을 강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약점이라도 잘 관리함을

통해서 얼마든지 신앙과 삶을 더 성숙케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삼손은 남자 앞에는 강하고 담대하나 여자 앞에는
잘 허물어지는 약점의 사람이다. 그러나 본인은 이성에 약한 자신의 약점을 알고 대처하지 못해 믿음을 잃음으로써 두
눈이 뽑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삼손을 통해 배우는 약점 관리의 교훈이 있다. 1)먼저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라. 약점을 알면 아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2)약점을 개선하는 법을 배우라.(삿14:3) 삼손이 부모님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삼손의 약점은 능히 극복될 수 있었다.(3절) 그러나 삼손은 약점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듣고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약점 때문에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관리되지 않는 약점은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약점이라고 관리되면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경험케 하는 믿음이 될 수도 있다.

셋째, 사명을 관리하라.


나실인으로 바쳐진 삼손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그 구별됨의 증표로 머리를 길러야 했다. 삼손은 머리를 기르고

사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머리를 기르는 것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비밀이었다. 이처럼 사명은 그리스도인을 강하게 살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복주사 그가 시작한 일을 이루어 완성시키신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성경적
가르침이다. 사명은 축복의 열쇠이다. 사명의 자리에 있을 때 충만한 은혜가 임하고, 유혹을 이기게 되며 믿음의 역사를
경험케 된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하여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만든다. 그러나 끝까지
사명을 붙잡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결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보시고 승리의 역사를 나타내신다. 믿음으로 행한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 삼손이 삶의 관리하지 않은 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교훈해 준다. 그것은 만남과 약점을
관리하는 것이다. 사명을 잘 관리함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요즘 우리 나라를 봐도, 또 세계를 봐도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너무 극심하다 보니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 못하다.
그야말로 ‘가진 자들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진 자들은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이 누리는 것의 손톱만큼도 누리기가 어려운 불공평한 세상이다.
비록 지금은 화제가 되었던 초반에 비해서는 흐지부지 되어버린 형국이지만,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가진
자들을 향한 시위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번졌고, 지구촌의 민초들은 이 시대에 만연한 ‘불공평’에 분노하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를 가진 자로 봐야 하고 어느 수준까지를 가지지 못한 자로 봐야 하는지는 아무로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심지어 증가시켜서, 또 그것들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되물림
하려 한다. 분명 하늘의 축복은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이미 가진 것들을 기반으로 더 많은 것들을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게 되어있다.
반면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나마 가진 것들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고, 또 그렇게 가지지 못한 인생을 자손들
에게 되물림하게 된다. 분명 하늘의 저주는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갖기가 너무나 어렵고, 심지어
그나마 가진 것들도 잃게 되어있다.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법칙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로 바뀔 수 있는 길은 그야말로 로또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식으로, 정말 아무런 배경 없이도 스스로의 노력 만으로 인생의 역전을 일궈
내는 성공신화가 제법 있었지만, 현 시대는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올 수 없도록 구조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이제 용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부모의 재력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단계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되물림되고, 또 대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이 되물림되면서, 가지지 못한 자로 인생을
사는 게 너무나 고달프기에 우리는 가진 자들을 향해 분노를 내뿜는다.

그런데, 이렇게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두 가지 경우일 수 있다.
하나는 이렇게 비정상적인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유지시키는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이다. 이들은 이렇게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와 지나치게 가지지
못한 자가 지금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아마도 가진 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이렇게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결국 이들을 통해 변화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다른 하나의 시선은?
자신은 많이 갖지 못했기에 그 가진 자들이 너무나 밉고 못마땅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는 시선이다.
즉, 빈부격차가 부당하다고 믿으면서도, 언젠가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즉 가진 자들이 미우면서도 부러운 시선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서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썩은 정치인을
비판하면서도, 그 썩은 정치인이 누리는 부와 지위는 은근히 부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솔직한 속마음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비록 지금은 가지지
못한 자에 속하지만, 언젠가는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이러한 시선과 바램을 지닌 채, 그러나 겉으로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부당함과 불공평을 바꾸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본인은 이익을
취하고 풍요를 누리는 입장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인지 알고 싶다면 답은 간단하다.
지금 나의 현재 상황에서 분명히 어딘가 존재하는 나보다 못한 이들, 나보다 낮은 이들을 위해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양보할 의사가 있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명색이 언론 공부를 했고, 기자라는 명함을 5년 째 갖고 있는 필자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정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진 자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들 가운데, 앞서 언급한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이 정치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면 좋겠다는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드문데, 하물며 얼마든지 가진 자의 입장이 될 수
있는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 중에서는 얼마나 드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드문 사람을 분간하고, 알아보고, 지지하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존중이 자연스러운 존중의 문화, 외국인이 하는 반말은…

존중이 자연스러운 존중의 문화
외국인이 하는 반말은…

아직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유럽의 한 나라에서 살면서 어떤 외국 사람이
나한테 한국말을 해오면 너무도 반가와야 할터인데, 그들이 하는 우리나라 말을 듣는 나는 너무도 기분이 상했다.
나는 언젠가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항구 근처의 거리에 모여 사는 난민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기위해 여러번 영국 친구들과 음식과 옷가지들을 가지고 봉사하러 간일이 있었다.

그 난민들은 영국에 불법 이민을 하기위해 아프리카나 중동권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내가 한국사람
이라는것을 알게된 한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에게 한국말을 하는것이었다.그들이 하는 말인즉; 야, 왔냐?
먹었냐?  배고파? 마셔!  등등이었다. ‘당신들 나를 얕잡아 보고하는 소리냐?’ 고 혼내줄수도 없고, ‘그렇게
말을 하는것이 아니다' 라고 가르켜줄 시간도 없고…그냥 속이 상하지만그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눠야 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반가와 하며 자기들이 아는 한국말로 나를 반겨준 것일진데, 그런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는 반말을 듣자니 속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나에게 그렇게 편하게 하는 반말은 물론 그들이 한국사람한테 종종 들어 익숙해진 말이었을것이고,
그런 말투에 따라 배운 표현 또한 아주 기분 나쁘게 하는 표현 이었다.
결국은 우리가 외국인들의 인격을 무시하며  함부로 내 뱉듯이 한 말이 우리한테 돌아온것 이었다.

너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사람이니, 너는 피부 색이 다르니, 너는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니, 너는 천한
막일을 하는 사람이니, 너는 우리나라 말도 할줄 모르니….
이유가 어떻던간에 우리가  어떤 사람을 내려보기 시작하면 그사람에 대한 우리의 말투가 달라지고 그 말투에 따르는
태도는 언어를 모른다해도 누구나 느낄수 있을것인즉, 우리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며 살자.
한국에 일하러온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말이, 영어를 하는 유럽사람들은 우대하고 그렇지 않은 외국인들은
매우 차별대우 한다는 것이다.  인격을 무시하는듯 해 듣기 거북했던 그 중동인이 내게 한 반말의 인사법이 그런면을
잘 보여주고있다.

그런데, 중동이나 동남아 아시아에서 한국사람들과 일을 같이 한 사람들이거나 우리나라 한국에서 일하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사는 그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일하면서,  아니면 한국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받은 좋은 인상을
갖고 우리나라를 홍보 해줘야 할진데 오히려 좋지않은 경험으로 인하여 한국을 모르는 이들에게 한국의 나쁜 인상을
나누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나라도 한때 가난하게 살았었다. 지금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늘의 한국은 경제적으로 높은 발전을해
물질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돈의 풍요가 남의 인권의 가치를 재는 줄자가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
한테는 아부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다루고… 돈이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는것, 하지만 각 개인의
인격은 그 어느 것 으로도 잴수 없는것이다. 어느 나라의 진정한 문화는 서로를 존중하는데서 꽃피우는것이라고 본다.

남자나 여자라는 성별을 떠나 , 어리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을 떠나, 교육을 많이 받고 적게 받은것을 떠나, 돈이 많거나
적은것을 떠나, 생김세가 이쁘고 미운것을 떠나, 피부색이 하얗고 까만것을 떠나, 영어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며 사는 문화가 이루워졌으면 좋겠다.
글쎄, 어린이나 청소년의 의견을 존중해주면 그들은 더욱 책임감을 갖고 우리가 하는말에 귀 기울여 주는것을 보았고,
아파하는 자에게 관심을 갖고 친절을 배풀어주면 눈물 흘리는것을 보았다.

사실 언젠가 이곳 영국에 영어공부하러온 한 이십대의 한국남자 학생과 알게되어 우리집 식구들과 종종 시간을 보내며
친하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학생이 하는말이 ‘저, 성함을 부르기에는 그렇고, 저 어떻게 불러야 좋을까요?’ 하고 물었다.
‘글쌔, 누나 아니면 누님? 그거 이상하게 들리면 아줌마는 어때?’ 하고 보니 참 그 단어도 이상하게 쓰여지고 있고…
사모님 이라던가 여사라는 단어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나는 그냥 여기 사람들이 하는것처럼 ‘경희’라고 불러주면
편하겠는데, 라고 해서 그는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듯 미안해하면서 내이름을 불렀지만 곳 마음 편히 내 이름을 불렀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존중스러움이 들어있었다.

그렇다, 남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높은 직책이나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많은 타이틀을 불러줌으로서 오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존중할때 느껴진다, 아 이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는구나 하고.
그러니 우리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살자 그리고 존중이 자연스러운 존중의 문화를 만들자.


박경희 비톤
아동교육 동화 작가
유로저널 칼럼리스트
www.childrensbooks.u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