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0일 금요일

황색 흑인 중국인들

황색 흑인 중국인들
 black Chinese1.jpg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코믹영화에서나 보일듯한 모습을 보았는데 '아니저 사람들은 
마이클잨슨 흉내라도 내려고 하는 건가
왜 대 낮에도 흰 가면과 장갑으로 얼굴과 손을 
감추고 공원을 뛰어 다니며 간 약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일까
?'
 그런 나의 반응을 눈치 챈 언니는 그 분들이 햇볕에 타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라며,
 "
무섭지?" 한다. "정말 무서운데!" 대답하며 걷다 보니 대부분의 여인들이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있다
하얀 피부를 간직하기 위해 서란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아프리카에 살 때 본 흑인 여성들은 그들의 피부색을 조금이라도 밝게 하기 위해
 피부에 해로운 화확성이 있는 크림도 마다하지 않고 쓰다가 부작용을 입어 고생 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는데 그와 반면
이곳 유럽의 백인들은 해가 나오면 웃통을 벗다시피 
하며 일광욕을 한다
.
 나의 직장 동료들도 휴가를 다녀오면 그들의 구리 색 피부를 자랑하며, '너 어디 휴가 갔었니,
 
피부색이 참 곱게 탓는데!' 라고 말해줄 지라면 너무 기분 좋아하며 어떤 이들은 피부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테닝베드에 올라가 피부색을 태우거나 아니면 구리 색 
스프레이를 얼굴과 몸에 뿌려가며 건강의 상징인 구리 색 피부를 갖고자 하는데
너무나
 창백한듯한 피부는 휴가는커녕 밖의 햇볕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난하거나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기에 백인들도 탐내고 흑인들도 나의 피부색을 부러워하는 것을 많이 경험하는데그런 내가 한국에 가면 피부가 어째 그리 탓 느냐는 소리를 듣는다.
 일본과 중국 여인들도 하얀 피부 갖기를 원해서 햇볕으로부터 얼굴이 가리고 뜨거운 여름날의
 해변가에서도 피부가 햇빛에 탈까 봐 물을 멀리하는 여인들이 많은데
......
 그런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흑인으로 받아달라고 하는 나라가 있다면 과연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굳이 흑인으로 취급해 달라는 그들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언젠가 아프리카의 한 나라인 잠비아 대통령이 그 나라의 경재가 몰려오는 중국인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을 우려한다고 연설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세계의 어느 나라인들 그
몰려오는 중국인들의 입력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
 잠비아에서 가까운 나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더치(Dutch-네덜란드)계의 백인들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인종차별을 받아오다가 그 백인 치하에서 벗어나 본토인 흑인들이 
주권을 잡고 통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고 있는데
그 나라에도 쳐들어 오다시피 들어오는 
중국인들의 진입은 막강막진이다
.
 그런데 그 쳐들어 오려는 자들이 자기나라에 막강한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산업 투자를 
갖고 오겠다니
어떻게 하면 가난 속에 시달리던 그 나라 시민들의 삶을 향상 시켜줄 수 있을까 
염려하며 고심 분투하던 정부에게 그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물론 두손들고 
환영 해 줄 일이다
.
 그런데 그 중국인들은 참 이상한 요구를 해왔다.
"우리 중국사람들을 흑인으로 취급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이 나라에 투자해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운데 자기들도 흑인으로 여겨 
달라니
남아프리카 정부는 감동을 먹어서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흰 피부색을 원하는 중국인들이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흑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심보는 
과연 무엇일까
?
 그 진상인즉그 동안 심각한 인종차별을 받으며 억울함 속에 살던 남아프리카의 새 정부는 백인 
통치에서 벗어나자 마자 새로운 취업기회의 순위 법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취업의 기회를 첫째로 
흑인
둘째로는 혼혈인셋째로 백인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낸 중국인들은 남아프리카의 정부에게 중국의 투자를 원한다면중국인들이 흑인 계에 
속한다는 법을 만들어달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이미 중국인도 흑인 계에 속한다는 
법이 만들어진 얼마 후였다
.
 두 손 들어 환영 받고 들어온 그들은 중국 사람들을 데려와 필요한 건물을 지었고 그 건물들이 
완공되자 일 자리 또한 대려 온 중국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법적으로 흑인이라고 
인정받은 중국인들에게 취업의 우선권을 아무 문제없이 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
 국내에 투자하는 외국회사를 통해 본토인들의 직업란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부와 시민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미움이 커가고 있지만 한번 발을 내달은 중국인들의 숫자는 
날로 커져만 가고 있고
그곳에서도 중국 여인들은 계속해서 하얗고 포얀 피부색을 갖기 위해 
햇빛을 피한다고 하니
......
 백인 같은 하얀 피부를 갖기 원하는 황색인 흑인들을 말하라면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옛날의 나는(XIV)

옛날의 나는 잘 살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부모 말 잘 듣고 어른 앞에서는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아서 어른의 말씀을 공손히 듣고 말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학교에서는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습니다다들 부러워하는 학교를 마치고 누구나 다니고 싶어하는 직장에서도 한 번의 슬럼프를 제외하고는 항상 선두를 달리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가정을 이루고부터는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아이들도 성공적으로 잘 자랐습니다신앙생활도 열심이었습니다신앙인으로서 베풀고 나눌 줄도 알았습니다무엇을 해도 열과 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릴 때부터 늘 칭찬을 들었습니다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이웃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나 칭찬을 들었습니다어려서는 어린 대로청소년기에는 청소년으로서성인이 되어서는 성인으로서 집안의 모범이었고 동네 이웃의 모범이었고 학교의 모범이었고 직장의 모범이었습니다그리고 누구나 나를 부러워하였습니다그러한 만큼 항상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였습니다참기도 많이 참았습니다화가 나도 참고 싫어도 내색하지 않고 더워도 참고 추워도 참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학업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왔지만 주위의 도움도 뿌리치고 죽을 힘을 다해 역경을 헤쳐나갔습니다주위 사람들은 그러한 저를 대단하다고들 말하곤 하였습니다그리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까지 왔다고 하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잔뜩 담고 살다가 빼기를 하면서 보니 잘 살아온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한 순간도어느 누구한테도 -부모형제자매한테도친구한테도직장 동료한테도그 밖의 모든 지인(知人)한테도 -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삶에서 마주친 만물만상에게도 잘한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삶의 모든 것들이삶의 순간순간이 오로지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사랑도 미움도 그러하였고 남을 위한다는 선행(善行)조차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였습니다신앙도 죄인인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죄인은 잘난 것이 조금도 없는데도 잘나고 오만(傲慢)하였고 죄인인 내가 사는 동안 행복 하려 하였고 죽어서도 잘 되려고 하였습니다위선(僞善)의 존재가 착한 척하며 위선의 삶을 살았습니다천하의 부끄러운 존재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한 삶을 살았습니다.

 옛날의 내가 잘 살았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錯覺)이었습니다허망한 존재가 미망(迷妄)을 헤매는 허망한 삶이었습니다꿈이었습니다.


 
새해 첫 글이자 오랜만에 여러분들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유학생으로 런던에서 언론 공부를 하고 있었던 2006 12공부를 하는 중에 실제로도 언론 일을 경험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당시 마침 글을 쓸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내고 있었던 유로저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7 1월 첫 주에 서른 즈음에의 첫 편이었던 그런 계절이 왔으면이 유로저널에 실리게 됩니다그리고어느덧 세월이 흐른 지금은 2012 1월입니다.

서른 즈음에를 처음 쓰기 시작했던 당시에 저는 채 서른이 되지 않은 20대였는데, ‘서른 즈음에를 쓰던 중 진짜로 서른이 되었고이제 서른을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서른 즈음에를 처음 쓰기 시작했던 당시에 저는 꿈만 있었지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어서 불안하기만 했던 유학생이었는데, ‘서른 즈음에를 쓰던 중 런던에서 헤드헌터로 취업도 하고비록 화려하지는 않을 지언정 그래도 하루 하루에 너무나 감사할 수 있는 안정된 삶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서른 즈음에를 통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무심히 흘려보냈을 수도 있었던 삶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들을 글로나마 간직할 수 있었고바쁜 일상 속에서도 서른 즈음에를 쓰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고 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서른 즈음에를 쓰면서 알게 모르게 만난 분들이 많습니다처음 뵈었는데 제가 서른 즈음에를 쓰는 전성민인 줄 아시고 반가워해주시는 분도 계셨고이메일을 주셔서 제가 쓴 어느 서른 즈음에’ 이야기에 너무나 공감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가끔은 서른 즈음에에 나름 시사적인 이야기도 썼지만결국 많은 분들이 가장 공감해주시고 좋아해주시는 이야기는 제 이야기,즉 그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속의 살아가는 이야기더군요.

특히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많이 공감들을 해주셨습니다퇴직하신 아버지에 대해 썼던 아버지의 퇴직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한인사회 어느 원로분께서도 참 좋아해 주셨고또 역시 이 무렵 아버지의 퇴직을 접하게 되는 제 또래 젊은 독자들도 눈물이 났다면서 공감을 표현해주셨습니다.

그럴 때면 너무나 감사하고또 행복합니다제가 글을 쓰는 목적또 음악을 하는 목적도 같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소중한 것들그냥 잊고 지내기 쉽지만 떠올려 보면 너무나 행복해지는 것들그것들을 상기시키는 게 제 글과 제 음악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제 글을 읽다 보면제 음악을 듣다 보면 삶이 소중하게 느껴지고무언가가누군가가 그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이렇게 지나고 보니 결국 제가 지난 시절 글을 읽으면서 (주로 수필을 많이 읽었습니다), 또 음악을 들으면서 가장 행복을 느낀 게 결국 이러한 것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형제 하나 없이 너무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저를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주었던 글은 삶의 소중한 단편들을 담은 수필이었고,또 통기타로 소박한 이야기를 읊조리는 포크음악이나 잠들기 전 틀어놓게 되는 아름답고 잔잔한 음악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다른 종류의 글도 읽었고다른 종류의 음악도 들었지만결국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는그래서 자꾸만 다시 찾게 되는 글과 음악이 따로 있더군요.

한편, ‘서른 즈음에를 쓰면서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잃은 것도 있습니다잃은 것들은 꼭 서른 즈음에’ 때문에 잃었다기 보다는지난 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만큼 변해버린 제 자신입니다.

그만큼 어른이 되어 가면서 덜 순수해졌고그만큼 사회 생활을 경험하면서 알게 모르게 영혼도 탁해지고이런 저런 갈등과 스트레스를 겪으면서가끔은 너무나 글을 쓰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실이번 주도 회사에서 고객사분과 너무나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정신적으로 너무나 황폐해졌더랬습니다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고객사분과 이렇게 감정이 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참 안타깝더군요.

살다 보면또 각박하고 치열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건만그냥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싫어집니다.

그렇게 자꾸 영혼이 상하는 일을 겪다 보면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되는 순간들이 늘어나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게 될까봐 너무나 두렵습니다.

서른 즈음에를 벌써 5년이나 썼습니다마치 지난 5년 동안 서른 즈음에라는 배를 타고 삶의 이곳 저곳을 여행한 기분입니다.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5년 동안이나 쓰게 될 줄 몰랐었는데...

이제 2012년이라는 새로운 여행길에 오릅니다그리고이후로도 얼마나 더 긴 여행이 될 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하지만어디까지가 될 지는 모르는 그 여행길이 너무나 행복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서른 즈음에를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