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2일 금요일

‘이제 고요한 아침은 없다' – '역동적인 한국을 알린다’


독일 명문 튀빙엔대학 '한국주간'
이제 고요한 아침은 없다' – '역동적인 한국을 알린다
한국의 예절음악영화서예태권도음식  한국문화의 모든  소개


지난 11(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엔 대학의 본관에서 한국주간 개막을 알리는 성대한 오프닝 세리머니가 열렸다본관 외벽에는 한국주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고 분수대 광장에서는 개막을 알리는 사물놀이 연주가 신명나게 펼쳐졌다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흥겹고 힘찬 한국의 장단에 맞춰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개막식에 앞서 프랑크푸르트 공관 한원중총영사는 튀빙엔대학 베른트 엥글러 총장을 예방했다.  엥글러 총장은 취임  매년 한국을 방문할 만큼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며 실제로  동안 한국과의 교류협력에도 많은 힘을 쏟아  것으로 알려졌다엥글러총장은 "튀빙엔대학 한국학과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앞으로 한국학과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임을 강조했다특히"한국은 연구개발이 매우 활발하며 과학기술수준이 높은 나라"라고 평가하면서 "한국 대학과의 학술 및연구교류와 과학기술협력을  활발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학생과 시민  4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 개막식 환영사에서 "한국은 역동적인 나라"라고 소개하면서 "Das Ende der Morgenstille"("고요한 아침은 끝났다" –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유래함)라는 이번 행사 주제가 매우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문화적으로도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라며 개막공연에 기대를 표명하는 한편"이번과 같은 대규모 한국 관련 행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튀빙엔대학이 독일  한국학의 중심지로 발전하길 바란다" 환영사를 했다.
 한원중 총영사는 축사를 통해 한독관계가 -EU 무역액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EU FTA 발효 이후 더욱 가속되고 있는 경제교류 뿐만 아니라 학술문화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확대강화되어 왔음을 강조하고독일대학에 등록된 한국인 유학생 수가 2011 기준  5,300한독 대학간 파트너쉽 체결건수도 100여건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특히 한독간 학술  교육협력 차원에서  튀빙엔대학이야말로 최초로 한국학과를 설치한(1979독일대학 중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왔음으로 언급하면서 특히 지난 521 고려대학에서 개관식을 가진 튀빙엔 한국학센터(TUCKU) 설치를 예로들며 엥글러 총장의 그간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했다.
 한총영사는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국제적 위상 제고에 따라 한국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만큼 튀빙엔대학 한국학과가 앞으로 더욱 발전해나가고금번 행사가 역동적인 한국을 알리고 한국학과의 발전에 기여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했다.
 로이팅엔상공회의소(IHK)  크리스티안 에르베 소장도 축사에서 지역내 독일기업  한국에 진출한 회사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으며 한국은 이제독일의 매우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가 되었다고 강조하는 한편이번 튀빙엔대학 행사가 한국의 문화 전반과 발전상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것으로믿는다고 했다.
개막식 행사에 이어 다양하고 수준높은 한국문화 공연이 펼쳐졌다참석자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한식으로 준비된 리셉션에서는 300인분 이상의 음식이 20분도 안돼 동이  정도로 한식은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한식의 인기는 다음날(12)에도 계속됐다학생식당 조리장이 한식조리법을 전수받아 잡채덮밥을 처음으로 선보였다학생들과 방문자들은 대부분처음 맛보는 한국음식에 원더풀을 연발하는  인기가 높았다.
본관에서 진행된 전통혼례식 시연행사도 많은 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외에  다례한글서예   우리 전통문화  소개되었으며 현호남 원장과 현호임 회장이 이끄는 '산다여' 팀이 수고해주었다호기심에 가득찬 관객들은 핸드폰으로  장면  장면을 촬영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날 저녁에는 태권도 시범행사도 열렸다. 600 규모의 실내체육관을 거의 가득 메울 만큼 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의 멋진 공연이 펼쳐졌다시종일관 관중을 압도하는 고도의 기예과 칼날같은 절도엄청난 격파술에 관중들은 경탄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국기원 팀에 앞서 선보인 독일팀의 태권도 시범 역시 뛰어난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박수를 받았다.
한국주간 행사는 11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 진행되었다이번 한국주간은 한국학과 차원을 넘어 대학의 축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튀빙엔 시의 행사로 확대될 정도로  규모나 프로그램의 다양성으로   한국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보여준 행사였다학술심포지엄과 학술강연을 비롯해 한국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과 독일에 활동하고 싶은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설명회도 매우 뜻깊었으며한국작가 초청낭독회를 겸한 작가와의 만남 그리고 한국전통무용 공연특히 14일부터 마지막날까지 일주일 15편의 우수 한국영화를 상영해 한국영화제를 방불케했다.

독일 유로저널 김운경

1 개막공연 3_가야금_김혜원.jpg3 한국학과 학생들.JPG 4 개막식전사물놀이1.jpg 2 한원중총영사.jpg5 독일 관중.jpg 6 국기원 시범단.JPG 7 국기원시범.jpg 8 대학식당(한식).JPG 10 튀빙엔대 한국문화행사.jpg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2)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2)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의 유럽 자전거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3. 포기할 수 없는 도전 그리고 감사한 분들

손발이 떨렸다.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정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구나. 다시 바로 데카틀론 안으로 들어가서 이 상황을 알렸고 그들은 나 대신 경찰서에 전화해줬다. 전화상으로 경찰은 내가 경찰서에 가야 한다며 여기서 가까운 경찰서 두 군데를 알려줬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둘 중 더 가까운 경찰서로 달렸다. 도착하여 건물 정문이 잠겨있음을 확인할 때 경찰관 한 명이 문을 열며 말 한 마디 대뜸 던지고 들어갔다. "끝났다." 인터폰 벨을 눌러보았으나 그 너머에 있는 경찰관도 "끝났다."라고만 말하고 인터폰을 끊으려 하였다. 아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할 필요도 없고, 야간에도 근무하는 경찰서나 그런 지점은 당연히 있을 것인데 끝났으면 어떻게 하라는 다른 대안을 줄 관심도 없다는 것인가? 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경찰관이 나보고 여기로 오라고 했다.”라고 재차 반복해 외쳐 댔다. 그제서야 잠겨있는 문 안에 있던 경찰관은 밖으로 나와 내 얘기를 들었다. 
결국 조금 전 데카틀론에서 들은 나머지 다른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꼬우면 출세해야지 다른 곳에 가면 해결해 주겠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나왔던 후드자켓은 자전거와 사라져 점점 차가워지는 몸을 이끌고 다음 경찰서에 갔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 간단한 보고서 작성을 마쳤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증명서를 받고 이제 끝났으니 가보란다. “혹시 내 자전거가 무슨 색깔인지 안 궁금해?” “응.” 그렇다. 난 여태까지 허황된 소망과 춥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축제에 흥분한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이 곳에 왔던 것이다. 
자전거 색깔조차 궁금하지 않다는 경찰관에게 “내 자전거 사진 줄까”라고 재차 물어본 난 참 미련했다. 경찰서를 빠져 나왔다. 올린과 친구들은 곧 집에서 나올 참이었고, 난 와이파이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그들을 기다릴 셈으로 두오모 광장 앞 버거킹으로 향했다. 날씨는 더욱 서늘했고 점차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버거킹에서 기다리다 심지어 잠까지 들었던 나는 친구들을 아직 만나기 전에 결국 집에 혼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낮에만 해도 밀라노와 난 함께 들떴는데, 내 출전을 경축하는 술자리를 잔뜩 기대했는데, 난 밀라노로부터 등을 돌렸다. 
사실 술을 좋아한다. 덴마크에서 김치 한 번도, 옷 한 벌도 안 사 먹고, 안 사 입은 대신, 덴마크에서 일을 갖고 수입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술은 사 마셨다. 친구들과 술을 즐기는 건 한국 친구들과나 외국 친구들과나 다를 게 없이 즐겁다. 
경찰서에서 보고서 작성을 다 마친 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라 여겼지만 그 엄청난 피로는 정말 대단했다. 집에 돌아와서 침낭을 피자마자 바로 그 위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즉 모험 6일, 비록 자전거가 도둑맞았지만 올린의 생활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날 까지만 올린 집에서 묵고 월요일인 모험 7일엔 올린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비록 분해도 자전거와 샀던 모든 장비를 다시 사야 했다. 이젠 정말 예산 문제였다. 단순히 아까운 호화 호텔이 싫어 카우치서핑을 찾았던 것과 달리 이제 아까지 않으면 여행을 끝낼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무료 숙박을 찾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밀라노 한인센터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을 하여 사정을 알렸고 한인센터에서 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난 안전한 곳에 지붕만 있으면 매트리스와 침낭 깔고 잘 수 있다고 말씀 드렸고 목사님께서는 다음날 오라고 하셨다. 모험 7일, 한 상자 가득 들은 짐, 뚱뚱해진 배낭과 이키아 가방 하나 들고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가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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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한인교회 이리노 목사님
이 목사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나가시고 한영진 집사님께서 날 맞이해 주셨다. 잠시 대화 끝에 한 집사님께서는 자기 집 안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줄 상황이 안되고 그렇다고 찬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안쓰럽기 때문에 차라리 따신 한인민박에서 아침밥 든든히 먹으라며 민박집에서 며칠 묵을 치의 돈을 건네주셨다. 이렇게 큰 돈을 받고자 온 것은 아니고 울타리와 지붕만 있으면 되는데, 결국 한 집사님의 언변에 못 이겨 봉투를 받고 교회를 나왔다. 한 집사님은 유쾌하신 분이셨다. 근처 바에 들어가 주스와 이탈리아 식의 간소한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난 다시 처음 이틀을 지낸 민박집을 향했지만 이 돈이라도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이번의 검색어는 '밀라노 한인 학생회'이다. 역시 구글신 아니 던가. 우리 구글신께서는 밀라노 한인 학생들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담긴 명단을 찾아주었다. 그 중에 첫 번째 남자이름의 학생인 김명식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인정이 많다. 흔쾌히 약속 장소를 정했고 이날은 김명식씨와 함께 잤다.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 늦게 퇴근하는 정말 바쁜 박사 유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날 즈음에 집 하수구가 막혀 여러모로 손님을 들이기가 불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음날은 다른 잘 곳을 찾기로 했다. 
이렇게 잠깐 잠깐 머무르는 방법으로는 숙박비는 아껴도 시간낭비가 심했다. 어제 오늘 음식을 잘 해먹지도 못해 여러모로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벌써 모험 8일인데, 차라리 호스텔 하나 잡아 다시 자전거와 모든 장비를 준비하고 빨리 출발해 버릴까…. 오늘 하루 더 찾아보자. 밀라노로도 카이스트에서 교환학생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이스트 국제협렵팀에 내 사정에 대한 기술과 함께 교환학생 온 학생들 연락처를 요구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다음엔 밀라노 총영사관에 전화했다. 
총영사관의 한미영 행정원은 총영사관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적당한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고 날 위로해주며 총영사관 당직 전화번호, 민박집 전화번호와 함께 밀라노 한국순교자천주교회의 김지현 요한 신부님 연락처를 알려줬다. 좀더 힘을 내자. 김 신부님께 전화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방도를 찾아보겠다고 잠시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으셨다. 제발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로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한 신자부부네 집에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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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화상통화
아, 드디어 안정된 거처를 구했다! 그 부부는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였다. 바로 전화를 걸어 감사하다며, 지금 운영하는 한국식품점 가게에 찾아가 직접 인사 드리겠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 부모님께 전화할 차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먼저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전화를 거셨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어머니께서는 왠지 내가 페이스북에 있을 것 같아 오래간만에 들어와봤고 페이스북에 영상통화 기능이 있길래 한 번 클릭해 본 것이라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오래간만에 아들과 영상통화하여 그저 행복해 하셨다. 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도둑 맞은 것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으셨다. 그래 이것도 어머니 말씀대로 큰 경험이다. 
가족처럼 챙져주신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JPG
가족처럼 챙겨주신 유성채 아저씨, 기효순 아주머니
돈 몇 푼어치 잃어버린 게 뭐 대수이랴. 난 우리 어머니로부터 ‘전화위복’을 배웠다. 10살이던 어느 날 학교 숙제로 종이로 된 자동차를 만들었다. 실수로 어머니께서 밟으셔서 자동차를 망쳤고 난 어린 마음에 울었다. 어머니께선 날 달래며 같이 다시 만들자고 설득하셨고 우리는 당연히 더 멋진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때 어머니께서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한 마디를 말씀해 주셨다. '전화위복' 이 말은 해가 지날수록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점점 더 파고 들어왔다. 모든 일은 결국 다 잘 될 거야.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날 위해서 돌아간다고 굳게 믿는다. 다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날 위해서'는 돌아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화위복'은 더욱 증명만 될 뿐이었다. 후회할 법한 일이 생겨도 그것은 더 좋은 것을 부르는 나비효과였다. 삶에 있어서 후회할 필요는 전혀 없고, 다시 행복해 지면 된다. 왜냐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걸 아니깐. 영화 선리기연의 손오공 역 주성치가 말했다.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역시 후회하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나에게 일어난 도난 사고도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수단이고 더 좋은 결과를 유래하는 사건이다. 
언제나 즐거운 앞날이 기대된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 아저씨는 남는 방 두 개로 가끔 민박집처럼 운영하였고 신부님께서는 내 숙박에 대해 금전적 지원을 해주시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흘 머무르는 동안 아주머니 아저씨께서는 날 가족처럼 매우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모험 12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밀라노를 떠나자. 김 신부님은 일이 있으셔서 직접 찾아 뵙진 못하여 전화로만 인사 드렸고, 이 목사님은 찾아 뵙고 인사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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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든 준비를 갖춘 새 자전거
두 분 다 좋은 말씀 전해 주시며 앞 길의 편안을 빌어주셨고, 난 드디어 첫 야영지를 찾아 나섰다. 적당한 야영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람의 통행이 없고 안전한 곳을 과연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몇 시간 헤맨 끝에 밀라노 시 외곽의 축구장 사이 작은 잔디밭(좌표 45.48915, 9.047371)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과연 안전할까, 누가 와서 야영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모험에 기대와 흥분을 안은 채 별일 없길 바라며 침낭 안에 몸을 맡겼다.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


2012년 5월 11일 금요일


김동령의 자전거 모험 (1)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의 유럽 자전거 여행기를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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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험의 서곡은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 안이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있고 나는 이탈리아로 가고 있다. 어두컴컴한 창 밖은 앞으로 나의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일이 년 후의 나의 미래까지도... 이제 나에게 집은 없다. 주소 없는 여행자로 세계 속에 나는 내 던져진 것이다. 
이제 나의 집은 텐트이고 이웃은 전 세계 모두가 될 것이다.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새로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랜만에 큰 여행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해서 자전거 타고 약 두세 달 간 덴마크 코펜하겐까지 돌아오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KAIST입학이 결정되고 같이 KAIST에 가게 될 친구와 둘이서 그해 가을에 호주로 배낭여행을 떠나 45일을 여행했고, KAIST 1학년이었던 이듬해엔 포항공대에 같은 시기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문 친구와 둘이서 30일 동안 정말 한 푼도 없이 국내 무전여행을 하였다. 이게 2003년이었으니- 나는 03학번이다- 2012년인 지금으로부터 보면 벌써 9년 전이다. 
아직도 호주, 국내무전여행 둘 다 모두 생생한데 그래도 오랜만이다. 2010년 가을학기에 덴마크공과대학(DTU, Technical University of Denmark)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지난 2월까지 계속 덴마크에 거주하다가 이제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혹은 취업하여 일에 전념하기 전에 9년만 에 큰 여행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사실 자전거로 유럽 여행하는 것은 덴마크에 오기 전부터 꿈꿔오던 것이었고, 덴마크에 오는 것이 결정되고 나서는 그 꿈을 실행에 옮기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었다.
덴마크는 물가가 비싸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미리 자전거를 하나 구입하여 덴마크에 올 때 가지고 왔다. 게다가 교환학기가 끝나면 2011년 1~2월의 겨울이기 때문에 중학교 때 입고 안 입던 오리털 파카, 스웨터 등도 모두 챙겨왔다. 
하지만 계획보다 일년 후인 2012년 2월에 난 지금 시작하고 있다. 지난 두 여행과 더불어 이번 여행을 하게끔 영향을 준 인물이 두 사람 있다. 바로 이찬양씨와 문종성씨다. 호주배낭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는 아직 영어도 못하고 해외 나가본 적도 없고 오래 여행해본 적도 없어서 사실 호주에서의 홈스테이를 고려했었다. 그런데 그 때 여행을 즐겨 하던 -현재는 전문 여행가가 되었지만- 이찬양씨의 홈페이지를 통해 용기를 얻어 긴 배낭여행을 단행하게 됐다. 
무전여행 결정 시에도 역시 이찬양씨 홈페이지로부터 많은 용기를 받았다. 그런 이찬양씨가 2007년에 자전거로 세계일주여행을 떠났고, 그의 자전거 세계여행기를 읽으며 역시 엄청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던 도중 2011년 가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전거 여행 중이던 문종성씨를 만났다. 그로부터 생생하게 들었던 수많은 자전거 여행의 아름다운 일화들은 날 무척이나 감동시켰고 이번 자전거 여행을 결행시키는 결정타가 되었다. 
그 아름다운 일화들은 거의 여행 도중 만난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고 나 역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는 것은 나의 도전에 성공하겠다는 목적의식도 물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삶을 이해하고 배우며 견문을 넓히는데 있다. 그런데 단지 자전거로만 하는 큰 여행이 아니다. 이찬양씨 문종성씨가 그렇듯 나 역시 텐트, 침낭 등 여러 장비와 함께 캠핑하며 여행할 것이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저가항공 이지젯 비행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온 자전거와 덴마크에서 프랑스 친구와 같이 여행할 때 쓰던 텐트, 침낭, 자동충전식 에어매트리스, 중학교때 입던 겨울 옷들 등이 함께 타고 있다. 비행기가 코펜하겐 공항을 뜬지 두 시간이 다 되가 곧 이탈리아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착륙하려 한다. 지금은 2012년 2월 21일 밤 10시 30분경, 나의 서곡도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마치고 이제 나의 모험은 시작된다. 오늘이 모험 첫째 날이다. 

 2. 채비를 다 갖춘 떠나기 전날 자전거와 장비 모든 걸 도둑맞다니
 밀란 말펜사 공항에 도착한 나에겐 짐이 많았다. 자전거를 포장한 자전거 박스, 짐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배낭 그리고 거기에 모자라 한 박스 가득한 짐. 나는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자전거 뒷짐받이는 이미 한국에서 장착해 왔기 때문에 앞패니어(자전거 바퀴 양쪽에 다는 가방)를 달기 위한 앞짐받이를 알아봐야 했고 물론 앞패니어와 뒷패니어도 역시 구입해야 했다. 또한 캠핑스토브 및 가스연료 등 캠핑장비 몇 가지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며칠간 밀라노에 머물러야 했는데 도난의 염려 때문에 이 많은 짐들을 호스텔에 놔둔 채로 밖을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돈을 좀 쓰더라도 채비가 끝나 떠나기 전까지는 한인민박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룻밤에 30유로라니 엄청난 비용이다. 재작년 덴마크에서 만난 교환학생 친구들끼리 셋이서 독일에 여행 갔을 때 두 명만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나는 몰래 들어가 빈 침대에서 이불 없이 자고 아침도 번갈아 가며 먹으며 점심, 저녁 치 빵, 쨈, 햄까지 몰래 싸가지고 나오며 여행하던 나 같은 참으로 저렴한 여행자에게 한식으로 아침상을 차려주는 한인민박은 말 그대로 초호화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덴마크에서 1.5년 살면서 김치 한 번 사 먹어본 적 없고 한국식당에 내가 먹고 싶어서 간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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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출신의 한인민박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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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민박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
밀라노 도착한 다음날부터 자전거 가게들을 방문하며 자전거장비 가격을 알아보는데 캠핑장비까지 사려면 이게 하루 이틀 안에 바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인민박은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에 비용이 안 드는 카우치서핑(현지인 집의 소파에서 숙박비 없이 지내며 같이 음식을 해먹거나 이야기 하는 등의 교류를 하는 일. 현지인을 호스트라고 하고 방문하는 여행객을 카우치서퍼라고 한다)을 알아봤고 다행이 호스트를 한 명 찾아서 밀라노 셋째, 넷째 날 밤(즉 모험 셋째, 넷째 날 밤)은 그 호스트 집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호스트랑은 나의 모험 넷째 날 밤까지로 약속했는데 모험 다섯째 날이 밀라노 카니발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고 호스트가 나와 같은 또래이고 유쾌해서 호스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축제 마지막 날 같이 술 마시고 밤새 놀기로 하고 하룻밤 더 있기로 했다. 게다가 며칠 동안 종일 밀라노 자전거 가게만 돌아다니면서 찾은 저렴한 자전거 가게에 맡겨놓은 자전거도 다섯째 날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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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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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의 친구 유린
다섯째 날 자전거를 찾고 스포츠용품점에서 캠핑장비를 구입하고 호스트와 축제를 즐기고 나는 그 다음날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장거리 자전거여행에 보통 많이 쓰는 자전거 뒷패니어가 한 쌍에 110유로가 넘었는데 내가 찾은 자전거 가게는 처음보는 브랜드의 가방에 사용이 약간 불편했지만 품질은 좋아 보이고 가격이 50유로밖에 안됐다. 앞뒤 패니어 함께 생각하면 이미 120유로는 절약한 셈이고 게다가 앞짐받이도 다른 데보다 30~50유로는 저렴하게 구입했다. 
이동거리 등도 함께 측정해주는 자전거 속도계, 안전을 위한 LED 라이트, 물병 케이지를 구입하고 브레이크패드를 갈고 이미 장착된 산악용 1.95인치 두께의 타이어에서 도로에서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1.75인치 두께의 타이어로(속의 튜브를 교체하지 않고 쓸 수 있는 가장 좁은 타이어. 좁을 수록 포장도로에서 빠르다)도 교체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다섯째 날 점심나절 모든 장비를 갖춘 자전거를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챙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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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 자전거 가게에서 구글 번역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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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가게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들
축제 마지막 날을 위해서인지 단지 날 위해서인지 그날 밀라노의 햇살은 얼마나 따스하던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입고 있던 후드자켓은 자전거 패니어에 기분 좋게 넣어 놓고 즐거워 보이는 분장한 사람들 사이로 나 역시 웃으며 유유히 자전거를 몰며 카이롤리 카스텔로(Cairoli Castello) 메트로 역 앞에 있는 스포츠용품점 데카틀론으로 향했다. 데카틀론에 도착한 때는 오후 6시쯤, 그 앞에 커다란 공원이 있고 그 반대편 가까이에 밀라노의 중심거리가 있는데다가 이날이 축제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그 주변엔 축제를 즐기러 나온 가족단위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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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맡겨 놓은 동안 관광객으로서
데카틀론 입구 바로 앞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워 자물쇠로 잠그고 들어가 약 한 시간가량 스펀지 매트리스, 랜턴, 등산양말, 작은 온도계와 나침반이 함께 달린 비상용 호루라기 등을 구입하였다. 이제 우리 호스트 친구들과 음주가무 할 차례다. 게다가 내일이면 드디어 출발한다. 들뜬 마음으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저녁이어서 사람은 많았고 밖은 어두웠다. 
어둡고 앞에 사람들이 많아 자전거가 잘 안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여전히 잘 안보이네? 없나? 없나? 설마 없나? 정말 없나? 자전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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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전거 세워놨던 자리

덴마크 유로저널 김동령 인턴기자
eurojournal@ek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