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직장’도 유럽경제위기로 휘청
EU 집행위원회, 위기에 리더십 미약하고 직원들은 고용불안 느껴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구들이 모여 있는 벨기에의 브뤼셀. 이곳에도 찬바람이 씽씽 불고 있다. 유난히 추운 겨울 때문만이 아니다. 경기침체로 EU 회원국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고 있는 상황에서 EU 기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며 EU의 양심이라 불리는 집행위원회(The Commission of the European Union, The Commission)가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이 내린 직장’ 근무자들, 고용 불안 느껴
경제위기 해결과정에서 집행위원회의 역할 미비
브뤼셀 중심가에 있는 벨라몽(Berlaymont) 건물. 14층으로 2만여 명의 집행위원회 직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유럽관료(Eurocrats: Europe+bureaucrats의 합성어)라 불리며 전문성을 인정받고 EU를 위해 일한다. 일단 공채에 합격해 집행위원회에서 근무를 시작하면 정년퇴직할 때까지 이곳에서 일하는 게 관례였다. 급여도 꽤 높은 수준이고 복지도 괜찮아 영국이나 독일의 경우 유명 대학 출신자들이 이곳에 근무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의 침체, 지난해 그리스 구제금융부터 시작된 유럽발 재정위기로 이곳 근무자들도 이에 이런 안락한 생활에 철퇴를 맞게 되었다.
일단 집행위원회는 초국가 기구로 EU 회원국의 특정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EU의 이익을 대표하도록 조약에 규정되어 있다. 집행위원회의 수장인 위원장이 거물급이거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현재 주제 마누엘 바로수(José Manuel Barroso) 집행위원장은 이렇지 못하다. 우선 포르투갈이라는 소국 출신이고 2004년 11월에 취임한 후 2009년 말 재임되었지만 독일이나 프랑스 등 주요국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위기 타개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가 바로수 위원장의 리더십을 탐탁하게 여기지 못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60여 년에 이르는 유럽통합사에서 최악의 위기인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무엇보다도 EU의 대표적 기구인 집행위원장의 리더십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다.
이달 초 바로수 위원장은 단일화폐 유로를 채택한 17개 회원국들이 단일채권을 발행하자(유로본드, Eurobond)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런 제안을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처럼 집행위원회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인력감축이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EU 회원국들이 경기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재정 적자를 줄이고 공공 분야의 인력도 감축하는 상황에서 집행위원회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최소한 급여나 복지의 증가세가 둔화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삭감될 수도 있다. 집행위원회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고용 불안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느 은행에 돈을 예탁해야 하는지도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경제위기로 은행들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 시중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심각하다. 또 부실자산을 많이 보유한 금융기관들은 자본을 재충당해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금융기관이 문을 닫게 된다. 따라서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는 금융기관에 예금 등을 예탁해야 하는데 이를 선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일부에서는 집행위원회가 경제위기 해결책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자기 밥그릇만 걱정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중동부 유럽의 한 외교관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집행위를 둘러싼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브뤼셀 근무자들 대다수가 현재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고 세미나를 열고 항상 더 나은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유럽의 통합과정은 그동안 위기 극복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번 경제위기라는 최악의 위기 수습과정에서는 이전과 달리 집행위원회의 역할이 아주 미비하다. 반면에 독일과 프랑스 등 주요 회원국들의 역할이 커졌고 이들은 되도록이면 EU기구의 간섭과 감독을 덜 받는 방향에서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특히 프랑스가 이런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회원국 주도의 의사결정 과정은 그동안의 통합과정에 역행하는 측면이 있다. 유럽통합은 유럽연합 차원의 정책 권한 강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과정을 되돌리기 때문이다.
안 병 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