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세기를 거슬러 떠나보는 유로 건축 여행 20선- (14) 이라크 출신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볼프스부르크 과학센터

동대문 운동장이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었다는 이유에서일까 몇 년 전 그 곳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노점상들과 함께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계적 수준의 복합문화
메카 건설이라는 키치아래 대한민국 서울시 동대문구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역사적, 지형적 컨텍스트는 
무모하리만큼 우리의 기억속에서 서서히 지워져 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건설은 여하튼 내년 완공을 목표로 지금 이 시간에도 한창 진행중인데 초청건축가
형식으로 치뤄졌던 공모전에서 현재의 디자인안을 제출하고 1등을 거머쥔 건축가는 다름아닌 자하 
하디드 (Zaha Hadid) 였다. 그는 지난 해 수상한 일본의 여성 건축가 가즈요 세지마 (Kazuyo Sejima)를 
제외하곤 7년 전 이미 건축의 노벨상 프리츠커 프라이즈 (Pritzker Prize)를 받은 유일한 여성 건축가였다.

그의 건축에서 흔히 보여지는 부드럽지만 역동적인 선들의 조합, 혹자는 이런 그의 건축을 매혹적인 
미래버전의 건축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프리츠커상 수상의 기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듬해 2005년 자하는 독일 복스바겐의 본고장 볼프스
부르크 (Wolfsburg) 에 과학센터를 완공하고 2006년 그로 인해 스털링 (Stirling) 프라이즈와 미스반
데로에(Mies van der Rohe) 상 등 여러개의 굵직굵직한 상들의 수상후보에 오른다.

 

실내와 실외 모두 콘크리트로 건설된 볼프스부르크 과학센터는 커다란 콘 모양의 기둥들로 떠 받혀져 그 아래로 보행자들이 자유롭게 건물에 진입할 수도 혹은 그냥 지나칠 수 있도록 랜드스케이프조차 콘크리트로 조성했다. 크기가 다른 이 8개의 콘형태의 기둥들은 물론 구조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은 계단실, 혹은 책방이기도 하고 때로는 건물 상부에 공급할 서비스 공간이기도 하다. 그 중 가장 큰 기둥이 바로 센터의 주 입구이다.


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가의 질문에 자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나는 단지 구조를 위해서가
아닌 건물 전체에 콘크리트를사용할 수 있어 콘크리트를 좋아하고 이 재료를 선택하게 되는 주된 이유이다.
물론 거기에 창문디테일을 덧붙이고 색도 첨가하지만 실질적으로 건물은 이미 완성된다.”  

앞서 서술한바와 같이 자하의 건축물은 대부분 역동적인 곡선의 조합이다. 때론 여성 보디 빌더의 
근육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하는 그래서 콘크리트를 즐겨 사용했을 것이다. 섬세하면서도 거친 
근육질을 표현하기에는 어떤 형태로도 제작가능한 콘크리트라는 재료만큼 적절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건축에선 우리가 흔히 운운하는 건축적 도시적 맥락에서의 
해석은 무의미하다.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여성 건축가라는 그의 세계적 명성이 이미 건축이전의 보증
수표로 통하고 있는 이상 박식한 자의 비평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공허한 외침으로 와 
닿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보증수표가 또한 정규교육을 받고 도시와 건축을 온갖 맥락안에서 이해하며 
작업을 해오던 공모전 심사단들의 뇌기능까지 마비시키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수천억원의 건설비용을 집어 삼키고 있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완공되는 내년 과연 시민들은 그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또 어떻게 평가를 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박치원
RIBA, ARB (영국 왕립 건축사)
SMAL AND PARTNERS
디렉터

뉴카슬 대학 건축 디자인 디플로마 튜터
www.smalandpartners.com
cpark@smalandpartners.com

삶을 관리하라 삿14:1-4

삶을 관리하라 삿14:1-4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사람의 행하는 모든 일이 완성된다는 믿음과 아울러 하나님은 믿고
행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신다는 믿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에도
게으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관리해야 한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12대 사사로 부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삶을 관리하지 못해 믿음을 잃어버렸다. 삼손을 통해 믿고 행하기 위해 어떻게 삶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만남을 관리해야 한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로서 기대가 되는 출발은 하였지만

한 여자를 잘못 만나서 기대 밖의 인생으로 전락하였다. 삼손의 실패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만남을 관리하는데 있어야
할 교훈을 준다. 삼손은 3가지 면 때문에 만남을 관리하지 못했다. 1(보는 것의 실패, 2(자신만을 위한 선택, 3(가지
않아야 할 곳을 찾아감. 그러므로 축복된 만남을 위해서는 반대로만 하면 된다. 1(잘 보아야 한다. 2(하나님의 영광에
유익이 되는 만남을 가져야 한다.)창1:26( 3(가지 않아야 할 곳을 피해야 만남이 관리된다. 승리의 비밀은 넘어질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창39:7-9(

둘째 약점을 관리하라.


사람은 약점이 인생을 실패케 만들고 장점이 인생을 강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약점이라도 잘 관리함을

통해서 얼마든지 신앙과 삶을 더 성숙케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삼손은 남자 앞에는 강하고 담대하나 여자 앞에는
잘 허물어지는 약점의 사람이다. 그러나 본인은 이성에 약한 자신의 약점을 알고 대처하지 못해 믿음을 잃음으로써 두
눈이 뽑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 삼손을 통해 배우는 약점 관리의 교훈이 있다. 1)먼저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라. 약점을 알면 아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2)약점을 개선하는 법을 배우라.(삿14:3) 삼손이 부모님의
충고를 들었더라면 삼손의 약점은 능히 극복될 수 있었다.(3절) 그러나 삼손은 약점을 인식하지도 못했고 듣고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약점 때문에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관리되지 않는 약점은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약점이라고 관리되면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경험케 하는 믿음이 될 수도 있다.

셋째, 사명을 관리하라.


나실인으로 바쳐진 삼손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으며 그 구별됨의 증표로 머리를 길러야 했다. 삼손은 머리를 기르고

사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으로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머리를 기르는 것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비밀이었다. 이처럼 사명은 그리스도인을 강하게 살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복주사 그가 시작한 일을 이루어 완성시키신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성경적
가르침이다. 사명은 축복의 열쇠이다. 사명의 자리에 있을 때 충만한 은혜가 임하고, 유혹을 이기게 되며 믿음의 역사를
경험케 된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하여 사명의 자리를 떠나게 만든다. 그러나 끝까지
사명을 붙잡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결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보시고 승리의 역사를 나타내신다. 믿음으로 행한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게 된다. 삼손이 삶의 관리하지 않은 것 때문에 믿음을 잃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 삶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를 교훈해 준다. 그것은 만남과 약점을
관리하는 것이다. 사명을 잘 관리함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가진 자들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불편한 진실

요즘 우리 나라를 봐도, 또 세계를 봐도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너무 극심하다 보니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곱지 못하다.
그야말로 ‘가진 자들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가진 자들은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반면,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이 누리는 것의 손톱만큼도 누리기가 어려운 불공평한 세상이다.
비록 지금은 화제가 되었던 초반에 비해서는 흐지부지 되어버린 형국이지만,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가진
자들을 향한 시위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로 번졌고, 지구촌의 민초들은 이 시대에 만연한 ‘불공평’에 분노하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를 가진 자로 봐야 하고 어느 수준까지를 가지지 못한 자로 봐야 하는지는 아무로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심지어 증가시켜서, 또 그것들을 그대로 자손들에게 되물림
하려 한다. 분명 하늘의 축복은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이미 가진 것들을 기반으로 더 많은 것들을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게 되어있다.
반면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나마 가진 것들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고, 또 그렇게 가지지 못한 인생을 자손들
에게 되물림하게 된다. 분명 하늘의 저주는 아닐 듯 한데,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갖기가 너무나 어렵고, 심지어
그나마 가진 것들도 잃게 되어있다.

이 잔인한 자본주의의 법칙 속에서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로 바뀔 수 있는 길은 그야말로 로또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식으로, 정말 아무런 배경 없이도 스스로의 노력 만으로 인생의 역전을 일궈
내는 성공신화가 제법 있었지만, 현 시대는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올 수 없도록 구조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이제 용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부모의 재력과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단계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되물림되고, 또 대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이 되물림되면서, 가지지 못한 자로 인생을
사는 게 너무나 고달프기에 우리는 가진 자들을 향해 분노를 내뿜는다.

그런데, 이렇게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두 가지 경우일 수 있다.
하나는 이렇게 비정상적인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유지시키는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이다. 이들은 이렇게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와 지나치게 가지지
못한 자가 지금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아마도 가진 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이들 가운데 이렇게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결국 이들을 통해 변화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가진 자들을 바라보는 다른 하나의 시선은?
자신은 많이 갖지 못했기에 그 가진 자들이 너무나 밉고 못마땅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는 시선이다.
즉, 빈부격차가 부당하다고 믿으면서도, 언젠가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즉 가진 자들이 미우면서도 부러운 시선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서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썩은 정치인을
비판하면서도, 그 썩은 정치인이 누리는 부와 지위는 은근히 부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솔직한 속마음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비록 지금은 가지지
못한 자에 속하지만, 언젠가는 가진 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이러한 시선과 바램을 지닌 채, 그러나 겉으로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부당함과 불공평을 바꾸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부당하고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래도 본인은 이익을
취하고 풍요를 누리는 입장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쪽인지 알고 싶다면 답은 간단하다.
지금 나의 현재 상황에서 분명히 어딘가 존재하는 나보다 못한 이들, 나보다 낮은 이들을 위해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양보할 의사가 있는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된다.

명색이 언론 공부를 했고, 기자라는 명함을 5년 째 갖고 있는 필자건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정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진 자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들 가운데, 앞서 언급한 구조적, 제도적으로 잘못된 현실이 진정
안타까워서 목숨을 걸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시선을 가진 이들이 정치인이 되고 지도자가 되면 좋겠다는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드문데, 하물며 얼마든지 가진 자의 입장이 될 수
있는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 중에서는 얼마나 드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드문 사람을 분간하고, 알아보고, 지지하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